행위

오유라 소동

조무위키

개요[편집]

오유라 소동(お由羅騒動)은 에도 시대 말기에 시마즈 가에서 일어난 오이에 소동(お家騒動)이다.

이명으로 요시나가 붕당 사건, 타카사키 붕괴라고도 부른다.

배경[편집]

원래라면 정실의 아들이 폐적되지 않는 한 다른 이가 가독을 이어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번주 시마즈 나리오키는 할아버지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의 영향을 받아 난벽이 있는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싫어하였으며 간신히 번의 재정을 흑자로 돌려놨더니 나리아키라가 다시 재정을 악화시킬까 두려워하였다.

또한 나리오키의 애첩 오유라는 자신의 아들인 시마즈 히사미츠가 가독을 상속받기를 원하였으며 즈죠 히로사토와 같은 중신들도 이를 원하였다.

하지만 모든 중신들이 히사미츠를 지지한 것은 아니였다.

중신 아베 마사히로와 하급 무사들은 지리적 위치와 류큐의 지배 등으로 인해 시마즈 가와 외국과의 다른 번에 비해 접점이 잦았으며 이에 서양의 사정에 밝은 나리아키라를 지지하였다.

사건의 발단[편집]

적자가 성관을 치루면 은거를 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나리아키라가 40살이 넘을 때까지 나리오키는 은거를 하지 않았고 가로인 즈쇼는 히사미츠를 지지하였다.

이에 나리아키라와 하급무사들은 나리오키의 은거와 즈쇼 제거를 목표로 결속, 가에이 원년(1848년) 가이에키의 위험을 감수하고 류큐의 밀무역을 노중 아베 마사히로에게 밀고하였다.

이에 즈쇼 히로사토는 아베 마사히로에게 심문을 받은 후 나리오키의 은거를 막기위해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음독자살하였다.

이것으로 시마즈 나리오키는 자신의 보좌역을 죽게 만든 나리아키라를 더욱 더 싫어하게 되고 히사미츠에게 가독을 이어줄 생각을 하게된다.

오유라의 저주 의혹[편집]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다수의 자녀를 보았지만 이중 3명의 여자아이 외엔 모두 죽어버렸으며 동생인 이케다 나리토시(池田 斉敏)마저 요절하였다.

하지만 시마즈 히사미츠의 자녀들은 잘 자라고 있어 나리아키라 파의 가신들은 오유라가 나리아키라와 그의 자녀들을 저주한다고 생각하였다.

사건의 전개, 결과[편집]

나리아키라는 에도의 가로 시마즈 히사타케(島津久武), 니카이도 카즈에(二階堂主計) 등 개혁파에게 지지를 받았고 히사미츠는 시마즈 히사타카(島津久宝), 시마즈 히사노리(島津久徳), 이쥬인 타이라(伊集院平) 등의 나리오키파에게 지지를 받아 이들은 점점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가에이 2년(1849년), 나리아키라의 4남 토쿠노스케(篤之助)가 사망하면서 나리아키라파와 히사미츠파는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고 젊은 번사들이 많은 나리아키라파에서 히사미츠파의 중신들을 참살하는 사건들이 잦아지고 즈쇼파의 악명을 열거한 밀서가 나리오키의 손에 들어오자 1849년 12월 3일, 나리아키라파의 중신(타카사키 하루타카, 시마즈 히사타케)들과 번사들을 체포하여 할복을 명하였으며 50명의 번사들을 칩거, 원도[1]하였다.[2]

나리오키의 체포명령에서 달아난 나리아키라파의 몇 번사들은 쿠로다 가의 후쿠오카 번으로 탈번하여 나리아키라와 친인척 관계에 있었던 번주 쿠로다 나가히로(黒田長溥)에게 도움을 요청, 나가히로는 이를 받아들여 이들의 체포 및 반송을 요구한 나리오키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난부 노부유키(南部信順)와 함께 노중 아베 마사히로에게 사태의 수습을 호소하였다.

나리아키라를 이전부터 지지했던 아베 마사히로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시마즈 나리오키를 은거시킬 것을 명해달라 요청하였고 이에요시는 나리오키에게 다기를 내리며 은거를 촉구하였다.[3]

쇼군의 명을 거절할 수 없는 나리오키는 결국 가에이 4년 2월 2일(1851년 3월 4일) 나리아키라에게 가독을 넘겨주고 은거하게된다.

이 사건의 계기가 된 오유라는 큰 처벌 없이 넘어갔으며 게이오 2년(1866년) 가고시마에서 사망한다.

그 외[편집]

사츠마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가고시마의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어있지만 일역덕 한국인들조차 관심이 없는 사건이다...

오유라 사건을 다룬 대중매체[편집]

  • 아츠히메<ref>오유라 사건 당시 개명 이전이라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가 아닌 시마즈 타다유키(島津忠教)로 나온다. 의외로 헷갈리는 사람이 있다.
  1. 遠島.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귀양 보내는 에도시대의 형벌이다.
  2.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그냥 할복을 한 번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3. 다기를 내리는 것은 은거하고 차를 즐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