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우가키 가즈시게

조무위키

조무위키에서는 용납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거나 그 반대인 경우, 또는 공과 과가 너무나도 극명하여 무조건 빨기만 할 수도, 그렇다고 까기만 할 수도 없는 인물입니다.
고인드립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나으니 괜히 드립 쳤다가 평생 까임권을 얻거나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문서는 존나 말도 안 되는 신분상승을 한 대상에 대해 다룹니다.
즉, 노력형 금수저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가끔 흙수저인 경우도 있지만 그런 애들은 재능충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너는 아무리 노오오오오력을 해 봤자 좆도 어림없습니다.
이 문서는 역사 속의 인물을 다룹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역사 속의 네임드 급 인물들입니다. 이 틀은 고인이 된 대상에게 사용하십시오.
내가 조선으로 가면 제일 먼저 농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겠다.
 
— 우가키 가즈시게


역대 조선 총독
3대 대행 4대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야마나시 한조
5대 6대 7대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그나마 정상적이었던 조선 총독.

병신력 자랑하던 헬본군 치고는 드문 사상을 가진 인물이였다.

물론 여러 방면에서 정책을 펼친 건 맞지만 그 정도로 찬양할 만한 새끼인건 아니다.

어차피 식민지 총독 자리란게 다 그렇겠지만.

나뮈에 이 놈 존나 찬양하는 새끼 있던데 여기도 그렇네? 디키는 아닐 줄 알았는데 좀 의외다.

일제시대 그나마 정상적인 유일한 총독

초기 생애[편집]

1868년 오카야마 현에서 농사꾼의 5쨰 아들로 태어났다. 흙수저 출신이라는 소리. 이 뒤로는 꽤나 승승장구했다. 소학교 교장을 거친 뒤 1890년에 일본 육사를 1기로 졸업한다. 이후 육군대학 졸업때는 꽤나 성적이 돋보였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기대를 모았다. 덴노도 만났고.

그리고 1891년, 보병 소위로 임관, 육군대학 졸업 후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1906년, 아내를 잃고 오하라 요시지로 소장 (자기 상관)의 딸과 재혼했다.

1913년, 일제의 문민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현역 군인은 군부대신 될 수 없다는 법령에 반발하여, 죽창질 끝에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채택하게 만들었고, 1915년엔 별 달았다.

ㄴ그게 아니고 개정반대다. 현역무관제에서 현역이라는 조건을 빼려고하자 이에 반발한거다. 한마디로 문민통제에 반대한 것.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바로 이 현역무관제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게된다.

1915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4년 다키아키 내각에 육군대신 지내고 1925년 대장이 되었다.

이후부터 1차대전 및 그간 들어난 일본군의 약점과 근대화를 위해 군축을 실시하였으나 장교단의 반발과 장비가 현대화된 것 빼고는 거의 얻은 것 없이 끝났다.

그리고 군내 파벌에 속해 정권다툼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 때 쿠데타를 준비했다고 알려져있다. 씨발 좀 애매한게 이 일에 우가키가 관여했다는 게 확실하지는 않으나 정황상 빼박이라 반대파에게 그 일로 공격당한다.

조선총독으로써[편집]

식민지 총독으로서는 당연한 정책을 취했다.

조선에 개인적인 호감이 있었던 걸로 보여진다.

악명높은 조선총독부를 어느정도 정상화시켰으며 조직을 개편하여 비대했던 총독부를 유연하게 만들었다. 토지조사국과 산림국을 합쳐 농림국으로 만들었다.

하고 총독부 인사개혁이라고 카긴 카는데 새로 들어온 국장급 인사들이 대개 우가키 본인과 연이 있는 새끼들이라 이건 굳이 말하면 허물이다.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지정하여 조선의 국보, 보물,천연기념물을 보존하려 노력했다.


전 문서에는 뭔 씨발 농촌진흥운동을 무슨 봉건적인 농촌사회의 악습을 타파하는 식으로 되어있던데, 일본이나 농촌진흥운동 하긴 했겠지 한국은 그딴거 없었다. 이 시기의 농업정책으로 촌락조직이 강화되고 농촌사회의 대표자로서의 지주들이 대두되었는데 이후 총동원정책으로 아ㅡ주 잘 써먹혔다. 한국에서 봉건 농촌사회 악습은 이승만+조봉암듀오의 농지개혁법, 그리고 6.25 전쟁으로 완전히 절딴났다.

공업적인 면모에 있어서는 일본의 금수저들의 요구를 반영한 티가 역력한데, 그에 따라 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군수공업을 추진한다. 그리고 악명높은 기형적인 경제정책은 이 시기때 나왔다.

남한은 깡농촌, 북한은 공업지역으로 육성하는 남면북양정책, 압록강과 두만강 지대의 국유림을 개발하는 북선개척, 전국에서 금 생산을 장려하는 산금장려정책 등 병참기지화를 위한 정책이 대부분이였고 그 과정에서 발전의 모습이 그나마 이전과 달라보이는 거지 사실 별로 좋은 건 아니란 거다.

내적인 모습으로 민족말살정책의 시동이 슬슬 걸리기 시작하고 (민족문화검열이 이때부터 점점 빡셔지거든) 내선융화라 캐서 내선일체 예고편이 틀어지면서 황국신민화 정책이 가속화된다.

결국 이 양반의 식민지정책은 전체적으로 한반도 병참기지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그 과정에서 농업 생산이 높아진건 좋은 영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어차피 30년대 후반부터 다 뜯겨나간다.

총독 이후의 생애는 딱히 알 필요없으니 패쓰.

평가[편집]

그 좆같은 원숭이 제국에서 서양에 있을 당시 배웠던 사상을 바탕으로 군비축소와 군국주의화,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 새끼도 결국 문민통제 극혐하는 좆본군 장교에다가 우익에 속하는 지라 여러번 있던 정권 다툼에 적극적이었고 한창시절에 진행하던 군축도 군 근대화를 위한 초석이였지 오히려 예비동원병력은 더욱 증대되었다.

군비축소되고 남은 장교출신 실업자들은 어린애들 교련과목지도로 돌려버렸고.

물론 이 새끼가 이끌던 파벌이 정권잡았다면 일제에게야 상황이 훨 나아졌겠지만 역시 역사엔 if란 없다. 결국 작은꼬마 큰꼬마 꽝꽝!

조선에서는 여러 정책을 펼쳤지만 역시 식민지 총독의 한계를 넘지못하고 황민화 정책, 이후 기형적인 병참기지화 정책의 시발점을 알리게 되었다.

걍 전형적인 식민지 총독이다.

근데 나머지 조선총독이 미친새끼들이라서 이 새끼가 돋보일 뿐이지. 한국인들 입장에서 딱히 그렇게 빨아제낄 만한 인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