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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어야 하다니...


우장춘은 대마도와도 바꿀수없다


대의를 한 평생 지켜낸 애국자

동시에 이휘소와 더불어 노벨상을 받을수 있으셨던 세계적인 과학자


그는 한국인 중 가장 커다란 '학문적 업적'을 일군 과학자였다

그는 한평생 개인의 이기가 아닌 조국의 안녕이란 가장 숭고한 가치를 지켜낸 애국자였다

그는 대한민국 개량농업에 지대한 공헌을 한 농학자였다

그리고 그는,

태어난 나라가 아닌 본인이 선택한 나라를 위해 살다 간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한국인 우장춘[편집]

만약 당신이 1950년의 우장춘이라 가정해보자

당신은 한국과 일본 중 한나라를 택해야하는 상황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나라를 선택하겠는가?


우장춘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 아버지는 친일파요
  • 어머니는 일본인이요
  • 태어나서 50년 넘게 평생 살아간 나라는 일본이요
  • 당연히 모든 삶의 터전도 일본

동시에

  • 친일파 아버지의 짐을 짊어져야하며 [1]
  • 모친과 생이별해야하며 [2]
  • 한번도 가본적 없고 말도 글도 낯선 한국, [3]
  • 부귀영화는 언감생심 어쩌면 신변마저 위험할수도 있는 한국 [4]


아마 많은 이들이 일말의 주저없이 일본을 택했을 것이다

맞는 선택이다. 명분도 실리도 모두 일본을 택할수있었고, 일본을 택하는게 합리적이다.


우장춘 역시 일말의 주저없이 한 나라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하지만 명료했다.


'조국'이 그를 부르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이런 훌륭한 세계적 석학을 곱게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

우장춘 박사의 한국 귀국을 막기위해 회유와 협박등의 갖가지 수를 동원했고 감옥에 가둬 귀국을 막으려는 수까지 꺼내들었다.


이에 우장춘 박사는 더욱 강한 강수로 응답했다. 제 발로 쓰시마 섬의 조선인 강제수용소로 들어간 것.

그렇게 우장춘은 한국인 신분증을 제시하며 송환선에 탑승,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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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귀국한 우장춘에게 한국 정부는 약 10억원의 이적비를 지불하였다.

그리고 우장춘은 이 돈을 개량농업에 쓸 우량 종자를 구입하는데 전부 사용하였다.


우장춘은 쉴틈없이 한국 개량농업의 기틀을 다졌다.

당장의 주식인 벼와 감자, 김치의 재료인 배추를 개량하였다. 그 유명한 '무추'가 바로 우장춘 박사의 작품


제주도 지역의 감귤 산업을 연구하여 감귤산업에 지대한 공로를 세우셨다. 이 연구의 씨앗은 오늘날 제주도를 감귤 산업의 메카로 만든다.


진작에 문화포장을 수여해야 했지만 박사님이 돌아가시기기 3일전에야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게 된다.

우장춘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주는구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죽는 그날까지도 미처 끝내지못한 개량농업을 염려하였다.

그렇게 우장춘은 한국에서 뜻을 펼친지 고작 9년만에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된다.


왜 그가 한국을 선택하게 되었나[편집]

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을미사변에 연관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우장춘이 한민족이라는 자각과 조국의 발전에 기여해야한다는 애국심을 갖추는데 결정적인 트리거가 됐다.


전혀 가본 적 없는 한국이지만 그의 민족의식은 매우 투철했다.

일본에서 개량농학을 연구할때도 우씨 성을 끝까지 고집해 '스나가'라는 성 대신 '우' 성을 기록한다.


과학자 우장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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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팬들 앞에서 절대로 이분을 까지 마십시오.
정말로 잘못 까다가도 본인의 안전을 보장해 드리지 않습니다.
모두 레전드에게 예의를 갖춥시다.

배추와 양배추 사이의 잡종인 유채를 실험적으로 만들어 자연적 합성종을 입증,

그 유명한 '우스 트라이앵글'로 '종의 분화는 자연선택의 결과' 라는 다윈의 진화론을 전면 수정하게 되었다.


그의 논문은 아직도 십자화과 연구에 무조건적으로 인용되고 세계 모든 교과서에 이론 창시자로 늘 언급되는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감이 잘 안 온다면 고등학교 이과 생물시간에 식물의 중간유전을 이 분이 유채로 증명해냈다고 알아들으면 된다.

살아계셨으면 100% 노벨상을 수상했을것이다.


씨없는 수박 창시자?[편집]

이상하게 한국에는 '씨 없는 수박 창시자'로 알려져있는데

우장춘 박사는 이 씨 없는 수박 개발에 1도 관여되어있지않다


거짓말 1도 안보태고 지나가는 국민 100명에게 물어봐도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손에 꼽을것이다.


다만 한국에 와 개량농업의 위력을 설명하고자 할때 씨 없는 수박을 교재로 활용하였다.

아마 이 부분이 와전되었을것이다.


상기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진실은 '씨 없는 수박' 개발과는 비교조차 할수없는 학업성과를 이룩하셨다.


각주

  1. 실제로 몇 정치인들은 우범선의 그림자에서 우장춘을 떨치지 못했고 진작에 문화포장을 받았어야했지만 우범선의 그림자때문에 우장춘이 죽기 3일전에야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2. 끝끝내 노모의 임종을 지키지못했다. 우장춘은 한국에서 어머니의 위령제를 지낸다
  3. 우범선은 우장춘의 유년기에 사망하였다. 우장춘이 한국에 오기전까지 한국말도 잘 못하고 한글을 읽지 못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 우장춘은 1950년에 귀국하였고 1950년 6월 25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