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다 히데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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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喜多秀家(실제 발음도 그렇고 정식 표기법도 그렇고, 우키타 히데이에가 맞다)

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으로, 평생을 모략과 음모, 암살로 보냈던 아버지와 달리 성실하면서도 인정이 많았던 성격이었다.

10살이 되던 해 아버지 나오이에가 병사하자 오다 노부나가의 도움으로 가독을 이어받고 영지자리를 보전받았다.

근데 나오이에가 생전에 했던 각종 모략과 음모,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귀부인+인처모에 성향 때문에 한 편의 막장드라마를 찍었다. 나오이에가 자기 형제와 딸, 심지어는 마누라까지 이용한 권모술수로 영지인 비젠지역을 먹었기 때문에 주변에 적이 굉장히 많았다. 여기에 더해서 장남인 히데이에는 아직 어린 나이인 10살이니 주변의 다이묘들이 마음만 먹으면 영지를 꿀꺽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니 나오이에는 동맹이었던 오다가 가신인 하시바 히데요시를 불러 뒷일을 부탁한다.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나름 효웅이었던 나오이에가 직접 부탁을 하니 거절했다가는 자기 모양새도 나빠질 뿐더라, 기분좋은 일이기도 하고 영향력도 넓힐 수 있으니 승락했다. 문제는 그 돌봐주는 방법이라는 게 나오이에의 아내(과부)를 자기 측실로 들이는 것이었으니 흠좀무.

어쨌든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양자 취급도 아니고 정식 양자로 들어가 토요토미 성씨도 받고 이름 중 히데를 히데요시에게서 따오게 된다. 히데요시가 어릴때부터 곁에 두고 굉장히 귀여워했었고 나중에 조카인 히데츠구가 처형될 때에도 히데이에는 전혀 의심을 사지 않았다고 하니 정말로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반면, 히데요시의 정실부인인 네네가 키웠던 진짜 히데요시의 혈족인 가토 기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와는 그닥 교류도 없었고 껄끄러운 사이였다고 전한다. 그럴만도 한 게, 첩과 함께 키웠던 귀족집 자제였으니 그냥 평민출신에 정실부인이 키웠던 성장과정의 차이가 컸으니까. 반대로 이시다 미츠나리나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교류가 많았고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 때 권율에게 털렸지만 벽제관 전투나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해서 나름대로 군공을 세웠다.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강항 선생의 간양록에 따르면, 히데이에는 약탈을 금지하는 등 민심 수습책을 펼쳤으나 퇴각할 때 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 데리고 갔다고.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서군쪽에 섰는데, 히데이에는 사석에서나 공석에서나 자신을 '도요토미 히데이에'라고 칭할만큼 도요토미 가문의 일원으로 자신을 생각했다. 더군다나 성씨도 받고 이름까지도 받았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또한 동군쪽이었던 가토나 후쿠시마와는 사이도 좋지 않았으니 서군에 선 건 당연했다. 그리고 서군측에서 1만 3천명의 병사를 동원해서 가장 군세도 컸다.

하지만 좆망.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은 쫄딱 망했고 히데이에는 재빨리 큐슈의 시마즈에게 도망쳐 몸을 숨긴다. 그런데 이건 이시다 미츠나리의 병신짓으로 인한 건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양족 중 누굴 택할까 계속 저울질하고 있는 걸 이시다 미츠나리는 방치한 데다가 시마즈 요시히로와 병림픽을 벌이니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입장에서 보면 서군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질만 했다. 하지만 시마즈 가문이 그를 숨겨주고 있다는 소문이 났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계되어 쿠도산에 유폐되었다가 처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우키다 히데이에도 참수하려고 했지만 처갓집인 마에다 가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면전에 대고 똥꼬쇼를 해서 우키다 히데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겨우 참수만 용서받았고 그 대신 우키다 히데이에는 이즈 제도의 하치죠시마로 유배된다. 하치죠시마는 도쿄에서 287km 떨어진 외딴 섬으로, 서울에서 남원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며 포항에서 울릉도 거리보다 더 멀다. 뭘 해보고 싶어도 일단 본토에 상륙부터 해야하는데, 몰래 상륙하기도 어려운 일이고 도와줄만한 가신들은 전부 죽거나, 아니면 자기 목숨 보전하기도 바빴다. 그걸 끝으로 우키다 히데이에는 장장 50년간의 세월 동안 일본 본토와는 완벽하게 단절된 인생을 살게 된다.

유배지에서는 시마즈 가문과 마에다 가문의 도움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는 하지만(도쿠가와 이에야스 입장에선 완전히 무력화된 우키다 히데이에에게 굳이 비참한 생활을 시켜서 민심을 잃을 이유가 없었다), 잠시 섬에 들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하에게 술을 얻어마셨다든지, 하치죠시마의 다이칸에게 주먹밥을 얻어먹고는 밥을 더 청해서 주먹밥을 만들어 아들에게 갖다줬다든지, 뜸을 만들어 잡곡과 바꿔먹으며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쌀밥을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등 불우하고 비참하게 살았다는 전설이 존재하는데 한 때는 최고 권력자의 양자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오지로 유배당해 목숨만 보전하는 그의 처지를 보고 생겨난 전설일 것이다. 근데 사실 아무리 마에다 가문에서 밥을 잘 대줬어도 문제는 살고 있는 곳이 하치조시마. 어떨 때는 한달 넘게 풍랑이 생겨서 거기 근처에 얼씬도 못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 우키타 히데이에가 밥을 굶기도 했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불우하고 비참하다는 것은 어쩌면 풍랑 때문에 본토에서 쌀을 갖다 주지 못해 며칠 동안 굶었던 것이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굉장히 오래 살았는데, 83세로 세상을 떠날 때 에도막부는 4대 쇼군이 취임했던 시기였다. 전국시대의 다이묘들 중에서는 굉장히 장수한 셈.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인물 중에서는 제일 늦게 죽었다. 덕분에 자손들은 화를 면하고 대를 이어 살다가 근대에 본토로 나갔는데 조상을 모시기 위해 다시 섬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2ch에서는 한 때 '도련님'이란 별명이 붙었는데, 지금은 수영의 달인으로 통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 '오사카 전투 때 히데이에가 참전했으면 어떨까?"란 스레를 만든 게 시작이었는데, '그럼 하치죠시마에서 헤엄쳐서 오란 말이냐www'고 답글이 달리던 도중(이 정도는 일본국사 시간에 기본적으로 배우고 가는 부분이니, 글을 쓴놈이 수업시간에 공부 안했다는 소리) 누군가 '우키타 비젠 츄나곤 하치로 히데이에, 도요토미 가의 위기를 듣고 하치죠시마에서 헤 엄 쳐 서 왔 다!!'고 위엄쩌는 댓글을 달아버린 것. 이게 특출난 재능은 없었지만 충성심은 뛰어났던 우키다 히데이에의 행적과 제법 어울려서 순식간에 퍼져나가며 밈이 되어 수영의 달인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1997년에는 생전에 히데이에가 증축했던 오카야마성 증축 400년을 기념해 히데이에와 그의 아내 고히메의 상을 하치죠시마에 건립했는데, 옛성인 오카야마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