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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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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역대 황제
4대 고종 선황제 진욱 5대 후주 장성공 진숙보 초대 고조 문제 양견

진숙보(陳叔寶, 553년 ~ 604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진나라의 제5대 황제이다. 보통 후주(後主)로 많이 알려져 있다. 어리석은 군주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진나라가 멸망당한 뒤 수 문제에게 장성현공(長城縣公)으로 책봉되었다.

강대한 수나라가 틈을 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치를 부리고 방탕했으며 수나라 공격 한 번 해보지도 않았고 날이 갈수록 정치가 부패해졌다. 진숙보는 대규모로 궁실을 지었는데, 584년 겨울, 높이 수십 장, 수십 칸으로 이루어진 임춘각, 결기각, 망선각을 세웠다. 이 세 누각 사이에는 복도를 설치하여 서로 왕래 할 수 있게 했는데 문, 창문, 난간은 모두 단향목으로 만들고 황금, 구슬, 진주, 비취로 장식했으며 밖에는 주렴을 달았다. 또 안에는 침대를 놓고 휘장을 걸었으며 안의 놀이감과 희귀한 물건은 고금에 보기 힘들거나 없던 물건들이었다. 또 산들바람이 불면 2~3리밖에서도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누각 아래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진귀한 꽃과 풀을 심었다.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술과 놀이에 빠졌다. 항상 공범, 산기상시 왕차 등 문사 십여 명과 뒤뜰에서 술놀이를 했는데, 마실 때에는 비빈과 문사들에게 함께 시를 지어 주고 받고 했다. 이렇게 군신이 밤을 세워가며 술 마시고 노래하며 놀았다. 우위장군 사마신은 기밀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세를 부렸는데 거역하는 자는 헐뜯고 따르는 자는 승진시켰다. 장귀비(장려화) 머리카락이 윤기가 있었고 그 길이가 7척이었는데, 기색이 좋고 광채를 뿜는 미인이었으며 영리하고 일처리를 잘했다. 이에 진숙보의 사랑을 받았으며 백관이 일을 아뢰면 진숙보는 장귀비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상의하여 결정했다. 그리하여 환관과 측근들이 서로 결탁하고 종친들도 거들었다. 이들은 거침없이 불법행위를 하고 매관매직을 하며 뇌물을 받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마구 쥐어짰다. 상벌을 내리는 명령은 후궁에서 결정되었으며 공범과 공귀빈은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의남매를 맺었다. 결국 장귀비, 공귀빈 두 비빈의 권력이 조정 내외를 좌지우지하여 진숙보도 그들의 말을 따랐다. 대신 중에서 간언을 하면 죄를 씌워 처벌했다.

비서감 부재는 "폐하께서 과도하게 주색에 빠져서...(중략)...소인이 곁에 있게 되고 환관이 권력을 남용하여 충신을 원수처럼 미워하고...(중략)...후궁들은 능라금수를 다투고 마굿간에는 콩여물이 남아돌지만 백성들은 살 곳을 찾아 헤매고 시체들이 들을 덮고 있으며...(중략)...신은 동남의 왕기가 여기에서 끝을 보게될까 우려됩니다."라는 장문의 표문을 올렸다. 그러나 진숙보는 그를 옥에 가두고 죽였으며 오흥 사람 장화도 "영토는 날이 갈수록 줄어 들고 수나라의 침공이 두렵습니다."라는 표문을 올렸다가 바로 살해당했다.

진숙보는 공범의 말을 들어 마음대로 장수를 바꾸고 문관으로 하여금 무관을 대체하게 했다. 결국 588년 10월, 수나라 양견은 진숙보의 부패와 무능을 보고 51만 8천명이라는 대군을 진왕 양광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이끌게 하여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장강을 이키던 장수가 이걸 보고 여러 차례 장계를 올렸으나, 시문경이 묵살하고 상소하지도 않았다. 진숙보는 이걸 알면서도 태연히 "왕기가 여기 있다. 북제의 군대가 세 번, 북주의 군대가 두 번 쳐들어왔으나, 패배하고 돌아갔다. 천명이 여기 있는데 저 놈들이 뭘 하겠는가?"라며 큰소리만 쳤다. 또 공범도 맞장구를 치며 여전히 대비도 않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짓고 풍악을 울렸다.

이듬해 정월, 수나라 오주총관 하약필이 교묘하게 장강을 건너 경구를 점령하고 종산으로 진격했다. 건강에는 10만 명의 군대가 있었으나, 겁쟁이 진숙보는 그제서야 겁을 먹고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 여러차례 장군들이 싸우자고 건의했으나, 시문경은 이를 모두 허락하지 않고 결국 수나라 군사가 건강으로 입성하는 상황까지 왔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진숙보 즉위에 공을 세운 소마가가 수나라 군사를 요격하러 갔으나, 그 동안 진숙보는 소마가의 아내를 입궁시켜서 놀아났고, 이 소식을 들은 소마가는 홧병으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덕분에 진나라 군사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진숙보가 측근 십여 명을 데리고 경양전을 나와 우물에 뛰어들려고 하자 후각사인 하후공운이 막았으나 진숙보는 기어이 우물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얼마 후 수나라 군사들이 우물을 살펴보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돌을 던지려고 했는데 당황한 진숙보는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알렸다. 결국 수나라 군사들이 진숙보를 새끼줄로 끌어 올렸으며 진숙보는 하약필을 보자 무서워 식은땀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 연거푸 절을 했다. 이렇게 어이없게도 진나라는 멸망했다.

4월, 진숙보는 진나라 황족들과 함께 장안으로 끌려갔는데 이 때도 항상 술에 취했으며 깨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진숙보와 함께 나라를 말아먹었던 장귀비, 공귀빈, 공범, 시문경 등은 간신으로 지목되어 장안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수문제에게 '왜 사치를 하지 않는 것이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문제와 신하들이 자기가 망한 이유도 모른다고 대놓고 비웃었고 604년에 사망하자 양제가 제위에 올라 시호로 '양'을 내렸는데 시법에서 양은 '여자를 가까이하고 예를 멀리했다.'는 의미로 대놓고 개새끼 내지 씨발놈이라고 욕하는 의미다. 아이러니한게 이 시호를 내린 수 양제도 훗날 당이 건국되고 나서 똑같은 시호를 받았다.(공식적인 시호는 세조 명황제이나, 당나라 입장에선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깎아내릴 필요가 있어 양을 시호로 줬고 이쪽이 더 널리 퍼졌다) 양제가 제위에 올라서 벌인 온갖 뻘짓은 진숙보와 똑같았다.


한줄요약[편집]

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