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청산리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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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에서 넘어옴)

개요[편집]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간도 청산리에서 발발한 전투이다.

백야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 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의 지역에서 열 번 이상 쪽본군과 싸운 일련의 전투이다.

배경[편집]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이 훈춘 사건이라는 만주 거주 조선/중국/일본인 학살 자작극을 벌이고 만주 장악을 시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자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했는데 이때 러시아 내전에 참전 중이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군이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와 휴전을 맺으면서 무기를 처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에도 무기가 판매되었다.

일본군이 청산리까지 진격하자 체코슬로바키아산 무기를 얻은 북로 군정서의 김좌진은 전투를 하기로 결심한다.

전투[편집]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백야 김좌진 장군과 훗날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가 될 이범석의 지휘 아래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하고 전투준비에 돌입했다..

청산리 계곡은 긴 계곡이었으며 계곡 주변은 숲으로 험난한 곳이었는데 일본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통해 매복하고 있던 이범석 부대와 한 판 떴다.

얼마 후 본대도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고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기 근처의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과 붙고 있었는데 이때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해서 오인사격으로 일본군이 쳐발렸다고 독립군 측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10월 22일 새벽 백야 김좌진 부대의 제1·2지대는 근처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그곳으로 이동해 일본군 기병과 떴다. 백야는 홍범도와 함께 일본군과 떴고 밤이 되자 독립군은 어랑촌 부근의 고지에서 철수했다.

10월 23일부터 일본군 수색대와 여러 교전을 벌이며 상류로 이동핬다. 25일 일본군이 기습했지만 독립군은 반격을 가해 이 습격을 저지했다고 기록했다.

피해는 대한민국 60명 전사. 일제 3000명 이상 사망.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 포위망이 빡세지자 동북쪽의 밀산으로 대거 후퇴했고 소비에트 러시아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의문점[편집]

하지만 독립군의 과장된 기록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남는다.

1.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에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한 총포를 노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2. 한국 측 주장대로 네 자릿수 인원이 전사했는데도 모든 전사자를 안치했다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다.

3.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당시 일본군 연대장 가노가 이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4. 3000여 명이나 전사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 연대들이 증원도 받지 않고 추격을 지속했다.

5. 3000여 명이 사망한 특기 할 만한 결과인데도 어느 곳에도 기록이 없다.

6. 한국 측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도 나온다.

7. 독립군이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으며 일본군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8. 독립군의 전과가 신문이나 사료마다 중구난방이다.

9. 청산리 전투 관련 연구 사료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계속해서 감소하였다.

10. 청산리 전투 패잔병의 사진이라고 알려진,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일본군의 복식이 1930년대 이후의 것이다. 따라서 그 사진은 청산리 전투의 사진이 아니라 후대에 찍힌 것이다.

그래서 한국 측도 이제 네 자릿수의 일본군을 사살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반박할 수 없는 팩트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1번은 19사단 보고서에는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2번은 야스쿠니 신사도 누락되는 등의 이유로 전사자를 빼 먹는 사태가 얼마든지 일어난다. 물론 3000명쯤 되는 걸 빼먹기는 힘들지만 십여 명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

7번은 독립군의 목적이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거였고 청산리에서 전투를 벌인 것도 추격해오는 병력을 따돌릴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서 후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작전 목표가 독립군을 섬멸하는 건데 이걸 실패한 이상 일본의 승리라고 말할 수 없다. 굳이 따진다면 일본이 전술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했다는 정도?

한국 사학계에서도 비판 중[편집]

사실 청산리 대첩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연구는 국내에도 있다. 다만 목소리를 내지 못할 뿐이다. 요즘은 교과서에서도 워낙 비판이 많아지니 전과는 이런 기록이 있다더라 정도로 알려주는 선에서 끝나기도 한다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하는 1개 중대 병력을 선두부대로 추격하여 백운평에서 약 1천미터 남짓 되는 지점에서 김좌진 부대와 접전하게 되었다.

……전투는 야스가와가 인솔하는 1개 중대와 적을 견제하기위한 북로군정서 후속부대 사이에 오전 9시 반경부터 시작되었다. 북로군정서 부대는 우세한 지세를 차지하여 적을 급습한 결과 비록 약 30분 동안의 전투였으나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적들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그날(21일) 전투 후 야마다지대는 오후 2시 반 가량까지 북로군정서 부대를 추격하여 노령까지 갔으나 산림을 이용하여 이동한 북로군정서 부대를 잃어버리고 철군하였다고 한다. 이를 역사상 '백운평전투'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서술에서 이 21일의 백운평전투를 대서특서하여 수다한 적을 섬멸하였고, 이에 덧붙여 적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맞불질하여 막대한 손신을 입었다고까지 하였다.

21일 전투의 전과정을 보면 실제 전투시간은 불과 한 시간도 못 되며 적들의 추격·수색시간까지 합하여 약 4시간 정도이다. 그런즉 이런 짧은 시간에, 그것도 약소한 후속부대가 그렇게 수다한 적을 섬멸할 수 있었겠는가? 적들의 손실도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한 선두부대에 불과하다. 가령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가 전멸되었다고 하여도 그 수는 백여 명 남짓일 것이다. 특히 적들 상호간에 맞불질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의 적 병력배치를 놓고 봐도 근거가 없는 과장이다.

(중략)

전투에서 북로군정서군의 교성대를 직접 인솔하여 전투에 참가한 이범석씨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담당한 국가수뇌의 신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의 공로를 과대평가하고 홍범도와 그 연합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도리어 홍범도군은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까지 역사를 왜곡하였다. 청산리전투의 전과도 지난날의 독립신문 보도에는 가노 기병대좌 이하 950여 명으로 기재되던 것이, 그에 의하여 1,200명, 그 후에는 3,000명으로까지 엄청나게 과대되었다.

청산리전투의 현장이 백운평이나 야지골, 완루구나 고동하 현장에 가본 이들은 그러한 큰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백운평에서 노령으로 가는 삼림도로가 잘 수축되어 자동차가 왕래하고 있으나, 전투 당시에는 청산리 송월평으로부터 냇물을 따라 진동나무 삼림 속으로 오솔길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일본군들도 자기들의 작전지도에 "청산리 서쪽부터는(죽평양촌) 야포도 통과할 수 없고 보병도 일렬종대로 통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즉 약소한 병력으로서 1000~3000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였다면, 그 많은 일본군이 원시림과 습개지로 이루어진 협소한 계곡을 일렬종대로 들어가는 데는 대단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또 그 많은 군대는 좁은 골 안에서 미처 산개할 여지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실제 병력을 고찰하면 백운평전투에 참가한 야마다 지대는 보병 5개 중대, 기병 1개 소대 그리고 기관총대와 보병포대였는데, 이들은 22일 노령 방면으로 추격하느라 어랑촌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22일 완루구전투에는 아즈마 지대 1개 대대와 기관총소대 2, 보병포대 그리고 천보산에서부터 우회하여 남양촌에서 숙영하고 서쪽으로부터 진공한 이이노 2개 중대였다.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는 처음 아즈마 지대와 함께 홍범도 부대를 포위하기 위하여 송평령, 차창자로 우회하여 21일 어랑촌에서 숙박하였다. 22일에는 아침부터 아즈마 지대 예비대(2개 중대)와 함께 어랑촌전투에 참가하여 김좌진 부대와 싸웠고, 오후 2시 반부터는 아즈마 지대와 이이노 부대도 어랑촌에서 홍범도 부대와 싸웠다.

이렇게 보면 21일 백운평 전투에 투입한 적의 총병력은 650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싸운 것은 야스가와가 인솔한 1개 중대이다. 22일 어랑촌 야지골에서 아침부터 김좌진 부대와 싸운 일본군은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와 예비대(2개중대)이고, 오후에는 홍범도 부대도 이 전투에 참가하다보니 아즈마 지대 1개 대대와 이이노 2개중대 합계 850여 명으로 계산된다. 그런즉 백운평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고 하여도 600여 명밖에 안될 것이고, 만약 야스가와 소좌의 선발대를 전멸시켰다면 100여 명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사실 전멸시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2일 어랑촌전투에서 김좌진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을 전부 섬멸하였다고 하여도 800여 명일 것이요. 청산리전투 전체에 동원된 일본병력은 후(24일 이후)에 2개 대대가 증가되었으니 2,500명을 초과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1,200~3,000명을 섬멸였다는 것일까.

상술한 전고에 대한 과장은 비록 당시 상해 독립신문에서는 직접 현지사찰을 못하고 원지에서의 투고에 따라, 그리고 당시 정세에서 민족의 반일투지를 고무하고자 다소 과장한 것은 양해할 수 있다손치자, 그러나 광복 이후 당시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던 분이 사실을 왜곡 과장하여 세상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박창욱 , 김좌진 장군의 신화를 깬다, 역사비평, 1994.2, 182-183, 186-187

양측은 전사자가 너무 다르니까 그냥 한국은 60명 전사. 일제 놈은 1200명과 3000명이 전사했다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