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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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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리 군단을 44년 만에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풍운아.

 ㄴ 바조 등등 많지 않음???
   ㄴ 흠... 그래도 득점왕 수상하고 발롱도르 까지 수상한거 보면 풍운아지. 반짝스타이기도하고


로시는 어린 시절 유벤투스 유스 팀과 함께했지만 유벤투스는 무릎이 좋지 않았던 그를 코모로 임대 보냈고 결국 그는 1976년 세리에 B 클럽 비첸차에 둥지를 틀게 된다. 비첸차는 로시에겐 행운의 장소였다. 그 곳에서 로시는 윙어에서 중앙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또다른 기막힌 골잡이를 탄생시킨 출발점이 됐다.

1976-77 시즌 로시는 곧바로 21골을 터뜨려 비첸자의 승격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지만, 이는 그 다음 시즌 그가 세리에 A에서 24골을 잡아내며 비첸차를 2위까지 끌어올린 놀라움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었다. 로시는 세리에 B와 세리에 A에서 연거푸 득점왕에 오른 최초의 선수가 되었고, 이는 훗날 유벤투스의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가 2007년과 2008년 세리에 B와 A에서 연속 득점왕이 되기까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거액을 들여 로시를 완전 영입한 당시의 비첸차는 ‘레알 비첸차(Real Vicenza)’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ㄴ 최소 인자기급
   ㄴ 골 게터 계보가 1970년 게르트 뮐러 1980년 파올로 로시 1990년 필리포 인자기 임

그 후 로시는 엔초 베아르조트가 이끄는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 팀의 일원이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로시의 활약은 관점에 따라선 4년 후보다 낫다고 여겨질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다(사실 82년 월드컵의 로시는 여러 모로 부침이 있었기에).

이탈리아 대표 팀에서 로시는 유벤투스 선수들인 로베르토 베테가, 프랑코 카우지오와 매우 훌륭한 호흡을 과시했으며 특히 자신의 옛 포지션인 측면 위치로 돌아 나아갈 경우에도 좋은 플레이를 펼쳐보였다. 로시는 1차 조별 리그에서 첫 경기 선제골, 두 번째 경기 선제골, 세 번째 경기에서 이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에게 맞서 1:0 승리를 일궈내는 어시스트를 연결하며 3전 전승을 이끈다.

그러나 2차 조별 예선에서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와 배정되어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선 그 경기 유일한 득점을 뽑아내지만 당대 최강팀들인 독일과 네덜란드를 넘어서지 못하고 탈락하고 만다. 이 대회의 로시는 활발한 움직임과 정확한 패스에 의한 어시스트들을 비롯, 이탈리아의 공격을 화끈한 것으로 만드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상술했듯 로시가 전체적으로 골의 거장 게르트 뮐러 계열의 선수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1978년의 로시는 조금 더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첫 월드컵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시련[편집]

1979년 비첸차가 강등을 당하자 로시는 페루자 임대를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시의 축구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터졌다. 1980년 AC 밀란, 라치오, 볼로냐, 팔레르모, 페루자 등이 연루된 축구 도박 스캔들, '토토네로 스캔들'이 이탈리아를 뒤흔들었고 이 사건에서 로시는 뇌물 수수 혐의로 3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에 처해진다(후에 이것은 2년으로 경감됐다). 이탈리아 축구의 새로운 희망은 이렇게 그라운드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됐다.


역적에서 영웅으로[편집]

1981년 유벤투스로 소속을 옮긴 로시는 월드컵 직전인 1982년 4월 29일 징계로부터 돌아온다. 2년이라는 기나긴 공백이 있었으나 대표 팀 감독 베아르조트는 로시를 신뢰했다. 그와 동시에 베아르조트는 80 유로에서 공격수 가뭄을 실감했기에 로시가 아니고서는 이탈리아가 우승할 수 없다는 확신하에 로시를 발탁하고, 그가 주전이 될 것임을 천명했다.

이는 이탈리아 전역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대표 팀이 1차 조별 리그에서 폴란드, 페루, 카메룬이라는, 요즘 말로 하자면 꿀 조에 배정되었음에도 3경기에서 단 두 골만을 터뜨리며 3무로허정무 똥줄을 태우며 진출하자 베아르조트에 대한 언론의 비난은 점점 더 거세졌다. 특히 실전 감각이 부족한 로시가 세 경기 동안 한 골도 터뜨리지 못한 것도 모자라 경기장 안에서 행방불명되며박주영 부담을 가중시켰다.

언론의 공격에 맞서 베아르조트는 언론 접촉을 아예 차단하고서 2차 조별 리그를 준비했다. 간신히 1차 리그를 통과한 이탈리아는 최강으로 평가받는 브라질, 전 대회 우승국 아르헨티나와 같은 조를 이뤘다. 언론은 형편없는 용병술 끝에 꿀 조에서 1위를 차지 못하고 죽음의 조에 배정되었다며 베아르조트에게 십자 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이 십자 포화 속에 디노 조프를 위시한 이탈리아 선수단은 오히려 단단하게 결속되며 이러한 정신적 무장은 실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지안카를로 안토뇨니, 브루노 콘티,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등이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와 4년 전 우승 멤버들이 포진한 아르헨티나를 압살하며 2-1 승리를 거둔 것. 하지만 2:1은커녕 3:1, 4:1도 나왔을 법한 이 경기에서도 그렇게 4:1을 만들어줬어야 할 로시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한 그대로였다.

이제 득실에서 이탈리아를 압도해서 비기기만 해도 진출하는 브라질과의 경기가 남았다. 이 경기에서도 로시가 여전히 있는 듯 없는 듯 경기한다면 향후 이탈리아 선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었다.

82년 브라질이 얼마나 대단한 팀이었는가. 지쿠, 소크라테스, 파울로 로베르토 팔카오, 토닝요 세레조의 황금 4중주로 대표되는 브라질은 우승 전력을 넘어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나 펠레의 브라질, 지단의 프랑스 같은 최강의 전력을 갖춘 팀 중 하나로 회자될 만한 전설적인 팀으로, 이탈리아와 경기 이전에 밥 먹듯 독일, 프랑스, 영국,스페인을 포함 24경기 무패 행진을 하며 패배를 모르던 무패의 팀이었다. 이미 이전 조별 리그에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훨씬 아름답고 완벽하게 분쇄하는 경기를 선보였으며 이탈리아가 4경기에서 4골을 넣을 동안 그들은 13골을 퍼부었다. 간신히 승리해온 이탈리아를 상대하는 황금 4중주 브라질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으나, 그 모든 예상이 부질없게도 경기를 쥐고 흔든 건 다름 아닌 파올로 로시였다.

안토뇨니의 절묘한 패스가 오버래핑하던 카브리니에게 연결, 그리고 크로스가 로시의 머리에 닿으며 5분 만에 선제골이 터졌다. 브라질은 소크라테스와 지쿠의 2:1 공격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로시가 브라질 수비진에게서 공을 낚아채며 재차 골을 성공시켜 2:1로 전반을 마친다. 후반전 브라질의 집중 공세 속에 팔카오(그 팔카오 아님)가 2:2를 만들어낸다. 그러자 경기 분위기는 다시 뒤바뀌어 브라질은 걸어잠그고 이탈리아가 두드리는 형국으로 변한다. 결국 승부는 세트피스에서 갈리는데, 코너킥 찬스에서 로시가 득점, 해트트릭으로 3-2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폴란드전 2골 결승전 1골을 넣어 우승으로 이끌었다.


은퇴[편집]

1986년 월드컵에 뽑혔는데 짱깨 새끼들이 부상을 시켜서 못 나왔다. 결국 부상으로 인해 빠른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