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조무위키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파울루스

Friedrich Wilhelm Ernst Paulus

1890.9.24 ~ 1957.2.1

스탈린그라드 전투엣니 패배하고 소련에 항복한 독일군 원수이다. 사실 원수도 그냥 히틀러가 항복하지 말고 자살하라는 의미로 올려준거다. 그래서 원수로써의 실권, 계급장, 원수봉 그런거 1도 없다.

능력과 별개로 국방군답지않게 전쟁범죄에 연루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런 행위를 막았다.

나무위키에선 이 인간 똥꼬를 헐도록 빨아재낀다. 지휘관으로써의 결함 때문에 패전한 스탈린그라드를 히틀러와 만슈타인 탓으로 돌리고 우리 반 히틀러 세력인 과울루스는 아무 잘못 없거든요? 빼애애액을 실천 중이다.

ㄴ파울루스를 옹호하는편이긴 한데 파울루스한테도 책임이 있다는건 인정햐던데.

전쟁 전[편집]

헤센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해군이 되고 싶었지만 받아주질 않아서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법공부를 했다. 근데 중퇴하고 육군에 갔다.

1910년 2월에 소위로 제111연대 참모가 되어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14년에 부상으로 잠깐 쉬었고 대위로 종전을 맞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4000명 밖에 남지 않은 장교들 중 한 명으로 남았기 때문에 엘리트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폴란드전[편집]

파울루스의 상관인 구데리안은 그를 똑똑하고, 영리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재능도 있어! 라고 평가했지만 동시에 인성, 우유부단함, 지휘력 부족등을 같이 지적했다.

그리고 이 지적은 정확히 파울루스를 잡아먹는다.

어쨌든 1939년 소장으로 진급한 파울루스는 제10 야전군 참모로 부임하여 폴란드전에 참전했다.

폴란드전 이후 제10군은 제6군으로 이름이 바뀌고 벨기에로 배치됐다.

1940년 8월 중장으로 승진한 파울루스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검토하는 임무를 맡았다.

스탈린그라드[편집]

1942년 1월. 발터 폰 라이헤나우는 원수로 승진하며 제6군을 떠났고 파울루스는 기갑대장으로 승진했다.

라이헤나우가 제6군 사령관으로 있었을 당시 게으르지만 결단력과 카리스마가 있는 라이헤나우와 우유부단하지만 성실한 파울루스는 죽이 잘 맞았다. 그 덕분에 라이헤나우가 공을 많이 세우고 원수로 진급한거고.

1942년 1월 17일. 라이헤나우가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1월 20일. 파울루스가 제6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대대까지밖에 지휘해 본 적 없는 주제에.

히틀러는 동남 공격을 위해 부대를 둘로 나눴고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를 공략할 부대로 제6군을 지명했다.

상병놈 히틀러가 짠 작전답게 제6군은 측면 가드도 없이 스탈린그라드로 달렸고 온 여름을 시가전에 소비했다.

히틀러는 11월 8일 뵐게르트브라우켈러에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스탈린그라드의 거점적 중요성을 말했다. "스탈린의 이름이 붙어있어서 점령하려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했지만 누가 그 말을 믿었겠는가. 물론 T-34의 주요 생산거점의 하나였으니 틀린 말은 아님.

육군본부에서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 한복판에 파란 색연필로 전선을 그었다. 하지만 실제론 건물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서 몇 개월이 걸리는 힘든 싸움이었다.

그 때문에 병력 손실이 많아졌고 겨울이 왔을 때 보다 유연한 작전을 벌일 수 없었다.

포위[편집]

소련군은 천왕성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했고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퇴각요청을 보냈다. 그리고 대차게 거절당했다. [1]

생존에 필요한 명령은 퇴각이었다. 그러나 퇴각은 일어나지 못했고 만슈타인의 겨울폭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구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프로이센 원수는 포로가 되지 않는다.'며 원수로 명예진급을 시켜줬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보헤미안 상병 주제에 누구한테 명령이야?" 그러면서 진급 다음 날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그래도 스탈린그라드에서 후퇴도 항복 안하고 존버한 덕분에 클라이스트가 지휘한 A집단군은 가까스로 탈출했음. 결국 6군은 항복했지만.

남은 전쟁 동안[편집]

포로가 된 독일군 원수는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독일쪽에도 선전용으로 좀 뿌렸고.

파울루스는 갇혀 지내면서도 딱히 소련군에 협조하진 않았다.

그러나 1944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이 터지자 소련이 만든 자유독일국가위원회를 맡아 공산주의의 따까리로 라디오 방송에 충실하게 참여했다.

히틀러는 평화시에 정복과 약탈이라는 전쟁을 일으켰다. 전 세계 역사상 전례 없는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다! -1944년 8월 8일 파울루스의 선전 방송

종전 후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참석하는데, 전범 입장이 아니라 검찰측 증인으로 참석했다.

나무위키에선 카이텔, 요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끝끝내 거부했다고 하는데 사실과는 정 반대다. 괴링, 카이텔, 요들의 유죄를 강력히 주장했고 자신의 부하들만 쉴드쳤다. 세놈 다 목이 매달려도 싼놈들이긴 하지만. https://youtu.be/KVVTg3tVqvQ?t=35m39s

심지어 억류도 아니다. 소련에 있는 자기 집에서 요리사와 하인까지 있는 아주 윤택한 생활을 즐겼다.

스탈린이 가지마 ㅠㅠ 했다고 안 간게 억류라면 할 말은 없지만.

종전후 인생[편집]

독일이 패전책임을 물어 동독과 서독으로 잘렸다.

파울루스는 동독에서 살게 되었는데 군인 그만두고 경찰 최고위 간부로 여생을 보냈다. 한국으로 따지면 치안감 이상이다.

각주

  1. 나무위키에선 이 당시 히틀러가 퇴각하지 말랬다고 했다고 파울루스를 있는 힘껏 쉴드치는데 파울루스 재량으로 얼마든지 퇴각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에서 프리스너도 명령을 무시하고 퇴각했고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티펠스키르히 "대장"도 히틀러를 무시하고 퇴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