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헝가리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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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토달거나 음모론 제기하다가 소뽕 빨갱이(으)로 몰리지 말고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게 잠시 묵념합시다.
부다페스트는 어 그거는, 반동분자들이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소련군이 치안유지 때문에 헝가리를 진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 흐루쇼프

개요[편집]

1956년 10월 23일부터 11월 10일까지 17일동안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소반공 혁명이다.

공산 정권이 혁명에 의해 쫓겨나고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잠시 들어섰으나 소련군이 탱크를 밀고 들어와 헝가리 수도인 부다페스트를 개작살내면서 해당 자유민주주의 정권 인사들은 사형당하고 다시 공산독재가 시작되었다.

소뽕 러뽕 새끼들 제발 혀 깨물고 자살 좀...

배경[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소련을 비롯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헝가리를 나치로부터 해방시킨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하게 되고 헝가리에는 친소공산정권이 세워지게 된다. 이와중에 그 공산정권의 통치자는 스탈린의 수제자를 자칭하는 라코시 마차시였고 철저한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일당독재 정치를 펼치며 반대파들을 티토주의로 몰아서 싹 다 숙청시켜버린다. 이 과정속에 토지 및 공장의 국유화를 시켰고 헝가리는 헝가리판 고난의 행군을 겪게된다.

그러다가 1953년 스탈린이 뒈짓하고 이후 정권을 잡게된 흐루쇼프가 반스탈린주의를 내세우며 스탈린 후장을 빨던 놈들을 싹 다 숙청시키면서 스탈린 라인이었던 라코시 역시 힘을 잃게 되며 개혁주의자였던 너지 임레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뒷선으로 물러나게 된다.

임레의 개혁개방정책으로 헝가리는 빠르게 경제를 회복했지만 뒷선으로 물러나있던 라코시는 호시탐탐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결국 1955년 4월 임레를 수상직에서 해임시켜버린다. 이러한 라코시의 행패에 헝가리 시민들은 분노했고 1956년 7월 라코시는 소련의 압박에 형식적으로 사임했지만 얼마안가 다시 복직하여 시민들의 분노는 결국 터지고 말았다.

전개[편집]

파일:Szétlőtt harckocsi a Móricz Zsigmond körtéren.jpg
헝가리 시민군이 파괴한 소련의 T-34 땅크

운명의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는 약 2만명의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스탈린의 동상을 때려부수며 스탈린 동상의 모가지를 질질 끌며 시위를 시작했다. 라코시의 따까리였던 제1서기장 게뢰 에르뇌는 라디오 방송으로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는 성명을 내보냈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라디오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이어나갔다.

마침내 그날 저녁 헝가리 보안군에 의해 유혈진압이 이뤄지면서 첫 사망자가 나오게 되었고 시위대는 급격하게 흥분하여 드디어 혁명이 시작되었다.

다음날인 10월 24일 헝가리에 주둔중이던 소련군이 시민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때 일부 헝가리군은 시민군에 참여하여 시민군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10월 25일부터는 혁명의 불길이 부다페스트를 넘어서 헝가리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고 마침내 10월 26일 헝가리 국회의사당이 시민군에게 점령되었고 라코시와 게뢰 등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인 친소파 정치인들은 소련으로 도피하였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자 이 사태를 진정시킬 사람은 그나마 헝가리에서 평판이 좋았던 임레밖에 없다고 판단하였고 임레를 수상으로 하는 온건파 신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임레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드디어 무력충돌은 일시중지 되었는데 문제는 임레 신정부가 시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당제 폐지, 비밀경찰제 폐지 등 소련식 공산주의와 완전히 다른 노선의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깜짝놀란 소련이 "아니 시발 혼란 진정시키라고 앉혀놨더니 뭔 반동짓을 하고있노?"라며 항의했고 소련군은 계속 헝가리 시민들을 유혈진압하고있었다.

이러한 소련의 깡패짓에 환멸을 느낀 임레는 "헝가리는 더이상 동구권이 아닌 중립국이다!" 선언을 해버렸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며 소련군의 학살극을 유엔에 고발해버렸다.

사태 진압하라고 바지사장으로 앉힌 임레가 통수쳤다고 판단한 흐루쇼프는 개빡쳐서 헝가리 국방장관을 납치하고 부다페스트에 대규모 기갑부대를 투입시켜 부다페스트를 완전히 뭉개버리고 헝가리 전역의 헝가리군을 전면 무장해제시켜버린다. 헝가리 시민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부대에 맞설수는 없었고 마침내 11월 11일 약 2주간의 혁명은 대학살극으로 종결나게 된다.

한편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너지 임레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대사관을 잠시 나온 사이에 소련군에게 체포당해 루마니아로 압송당했고 1958년 6월 16일 비밀리에 사형당한다. 그리고 그 시체조차도 못찾게 비밀리에 암매장당했는데 동구권이 무너지던 1989년이 되어서야 헝가리로 시신이 송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