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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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조종간을 놓지 않았던 기장, 부기장, 항공기관사분들

개요[편집]

1985년 8월 12일 일본 하네다 공항을 출발해 오사카 이타미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일본항공 JA8119 123편 항공기가 유압계통 파손으로 군마현 다카마가하라 산 중턱에 추락해 승객 524명 중 5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한 단일 항공 사고 로는 사상 최대의 사망자를 낸 대참사이다.

전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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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항공 B747기 123편은 오후 6시 정각에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이륙, 남서쪽을 향한 후 이즈오지마에서 서쪽으로 순항, 구시모토 상공에서 북서쪽으로 비행하여, 6시 56분에 오사카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오후 6시 24분, 사가미만 상공에서 순항 고도 24000피트(7200 m)를 향해 상승하던 123편은, 23900 ft를 통과하는 순간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123편의 벌크헤드와 수직 꼬리날개는 수직 안정판의 하단부만을 남기고 파괴되어 유압계의 총 4계통이 모두 찢겨나가 완전히 손실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조종타면을 움직이는 유압액이 모두 새어나가 조종 불능에 빠졌다. [1]

조종 불능에 빠진 직후 위와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들은 플랩과 4개의 엔진의 출력을 조정하여 어떻게든 기체를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한 번 선회를 시도하여 9,000 ft(2,743.2m)를 내려와 13,500 ft(4,114.8m)로 강하한 직후 기체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며 조종사는 결국 관제소에 조종 불능을 보고한다.

이후 기체는 약 30분 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보통 항공기 사고의 승객들은 비행기가 수십초 내로 추락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감정을 표현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끔살 당하지만, 123편 사고의 경우에는 해당 사고기가 30분 동안 선회를 계속했기 때문에 승객들이 쓴 유서 상당수가 남아있다.

그러나 항공기가 유압계통 손실로 인해 심하게 요동치는 상태에서 비행을 했기 때문에 승객들이 남긴 유서의 필체가 상당히 휘갈겨진 상태로 적혀있다. 더불어 엔진 출력차와 플랩을 이용한 조향마저 조종 불능 사태에 이르면서 결국 기체는 나리타 방면 항로를 완전히 이탈하고 만다.

한편, 다급한 상황을 듣고 있던 주일미군 요코타 기지는 123편이 비상착륙을 할수있도록 활주로를 비운채 구급차와 소방차들 까지 비상대기를 시켜놓고 도움을 주려고 하였다. 123편은 엔진 출력을 이용, 우선회를 계속하며 요코타 기지에 착륙하려 시도했으나 그때 불어온 남서풍에 의해 후지산 방향으로 좌선회를 해버리고 만다.

조종사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23편은 계속 하강하여 6시 56분 14초에 대지 접근 경보 장치(GPWS)가 작동했다.

17초 무렵, 기체는 조금 상승했다. 6시 56분 23초, 기체 후부와 오른쪽 주 날개가 수목과 접촉했다. 이때 기수를 올리기 위해 엔진 출력을 올린 것과 함께 기체가 급강하하면서 속도는 346kt(640km/h)에 도달했다. 이후 기체는 일단 상승했지만,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26초, 오른쪽 주 날개가 지면과 충돌하고 동시에 기체의 파괴가 시작되었다(수직·수평꼬리, 오른쪽 주 날개의 이탈). 28초에는 기체 후부가 분리. 기체는 기수를 내리면서 우측으로 회전했다. 6시 56분 30초, 123편은 타카마가하라산의 경사면에 반전하는 형태로 추락, 충돌했다.

6시 56분 28초까지 녹음됐던 음성 기록장치에는 23초와 26초 무렵에 충격음이 남아 있다. 23초의 충격음 직전에는, 기장이 「이젠 끝이야!(もうだめだ!)」라는 절박한 고함소리가 녹음되어 있다.

충격에 의해 기체 앞부분부터 주 날개 부근의 객실은 원형을 알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충돌 당시 분리된 객실 후부와 뒷날개는 산의 능선을 넘어 경사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객실 후부는 능선과의 충돌을 면하고, 경사면에 평행에 가까운 각도로 착지해 수목을 쓰러뜨리면서 능선의 경사면과 접촉하여 천천히 감속했다. 이 때문에 다른 부위에 비해 충격을 덜 받았다.

생존자들은 모두 충돌 당시 분리되었던 기체의 꼬리 부분에서 발견 되었다. 그러나 기체 앞 ~ 중간 부분에 탑승한 승객은 거의 대다수가 처참한 상태로 즉사한 채 발견된 상황이었고, 사고 당일 군마현 지역에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중상을 입은 생존자 중 상당수가 이튿날 아침 수색대가 도착하기 전 저체온증 으로 사망했다. (생존자들의 말에 따르면 10여명 정도는 추락직후에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사고 원인[편집]

추락한 항공기는 사고 7년 전인 1978년 6월 2일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 테일 스트라이크로 후미가 파손되어 제작사인 보잉에 정비를 의뢰한 기체였다. 비행기의 기압을 유지하는 격벽 (벌크헤드)이 파손되어 일본항공에서 수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규정대로 하자면 2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해야 하는데, 보잉의 기술자(정비 총 담당자)는 이중 철판 두 개로 대충 고정하는 실수를 범했고, 기체 후부와 맞닿아있는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거나, 휘파람 소리가 나는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항공과 보잉 측에선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1978년 123편의 테일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던 기장과 (해당 사고의 기장과 다른 인물) 보잉사의 정비 총 담당자는 이 사고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희생자[편집]

이 사고는 일본의 추석인 오봉을 맞아 귀성객들 및 관광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만석을 꽉 채운뒤 이륙했다. 그 때문에 희생자들의 사연도 다양했는데, 여름 고시엔 경기를 구경하려 혼자 비행기에 탑승한 9세 소년, 출장중에 변을 당한 샐러리맨 (유서의 주인공 중 상당수가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도쿄에서 연극을 전공하다 오사카에 있는 언니를 만나러 가다 변을 당한 한국인 유학생 등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줄을 이었다.

희생자들 중에선 유명 인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동양인 가수 최초로 빌보드에 진입한 가수 사카모토 큐한신 타이거스 구단주 나카노 하지무, 일본 대뇌 생리학의 권위자였던 오사카 대학교 전임교수였던 츠카하라 나카아키라 교수, 글리코 식품 사장 우라카미 이쿠오등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로 희생되는 비극을 맞았다.

사고 이후 및 여담[편집]

이 사고 이전에도 여러 대형사고를 일으키며 신뢰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던 일본항공의 이미지는 땅바닥으로 추락했고, 이 여파로 인해 2009년 도산 직전 까지 몰렸다. 회사가 망하기 직전이었던 2000년대 보다는 나아졌지만 현재까지도 일본 현지에서는 ANA와 저가 항공사에 밀려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여담으로 123기의 추락 이전 일본의 인기 가수 코이즈미 쿄코와 한신 타이거스 선수단이 해당기체에 탑승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일본의 3대 게닌 중 하나인 아카시야 산마도 해당 기체에 탑승하려다 예약을 취소해 화를 면한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신 타이거즈는 사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6연패를 하는 등 큰 충격에 빠졌지만, 우승을 영전에 바치고자 이를 악물고 뛴 결과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게 현재까지 한신 타이거즈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이다.

각주[편집]

  1.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시속 150km로 달리던 자동차의 브레이크 부분이 손상되어 속도를 줄일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