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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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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한민족 사상 미증유의 부동산 재벌이신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전국 애비자랑' 목적으로 만든 동양판 오벨리스크다.

상당히 거대한 비석인데 발해가 멸망하고 이후 한민족은 더이상 압록강 너머까지 갈 일도 없었고 1000년전 비석에 관심도 없어서 버려진데다가 청나라의 봉금정책 때문에 이 부근 지역자체가 아예 봉쇄되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그러다가 1880년 봉금정책이 해제되고 봉인이 풀려 사람들이 몰려오자 한 농부로 인해 발견되고 1888년 좆본의 사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비문을 해석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사실 이성계도 이 비석을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가 국내성을 지나면서 이 비석과 돌무덤 두개를 발견했는데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장군총과 태왕릉이었다. 근데 태조라는 놈이 자기들 조상 무덤을 금나라 오랑캐 황제꺼라고 알아보는 수준 ㅉㅉ

이성계가 조금만 관심이 있었으면 비문에 적힌 글귀들을 읽어보고 광개토대왕 것이라는걸 알텐데 어지간히도 관심이 없었던 듯

이 비석의 탁본은 만두, 호떡과 함께 청나라 아저씨들의 오랜 수입원이었다.

비석 내용은 광개토의 부동산 투자 운용 노하우와 그의 부동산 경력의 역경이 눈물과 함께 빼곡하게 도배가 되어있다.

신묘년 기사[편집]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신라 구시촉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도해 파백잔□□신라 이위신민

백잔(백제)과 신라는 과거에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쳐부수고[1]신민으로 삼았다.

해석 1 :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잔챙이들과 (가야)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 일본 임나일본부설 주장

해석 2 :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오니 (왕께서) 백제 잔챙이들과 □□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 현재 한국 사학계 정론

해석 3 : 신묘년에 왜가 오니 (왕께서) 바다를 건너 (일본에 있는) 백제 잔챙이들을 격파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 또 다른 해석

이 비석에는 과거 머가리가 국뽕질로 불타버린 좆본 역사학자들의 집단 자연발화와 관련된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비문 내용에서 쥐파먹은 자리를 중심으로 좆대로 창작해서 라이트 노벨을 싸지른 것이다.

창작내용은 대충'xx년도에 일본이 신라를 무찌로고 임나를 정복했다' 이런 내용인데

이 비문을 만든 목적은 장수왕"우리 아빠 최고!!!"라면서 대대손손 자랑스러워 하기 위해 세운 것인데 갑자기 쪽발이가 남부 왕국들을 쳐바른 공적이 들어간다는 건 너무도 이상하고 한심스러운 전개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용비어천가에서 갑자기 알렉산더 대왕의 공적이 난입하는 것과 동급인 수준이다.


사실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적개심과 우월심은 일본의 오랜 사서인 일본서기가 후대에 천황가 찬양을 위해 상당부분 개작, 창작 되어버렸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인데

이는 일본에서 제일 성공한 자이니치천황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문맥을 읽어보면 xx년도 기사는 임나일본부설이랑 별 상관도 없다고 볼 수 있다. 해당 기사 년도는 임나일본부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년도랑 다르고

왜(일본)가 신라, 백제, 가야를 정복했다고 (해석하는) 기사가 나온지 9년 만에 왜(일본)가 깨지고

백제는 고구려에게 항복하고 신라는 잠시동안 고구려 2중대가 되었기 때문에

임나일본부랑은 별 상관이 없다고 봐야한다. 차라리 고구려가 신라, 백제, 가야를 따까리 삼기 위해 왜(일본)라는 명분을 내세웠다고 보는게 맞다.

머한민국 정치인들이 서로에게 친일파타령 빨갱이타령 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주작의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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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일제가 비문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이 신묘년 기사의 渡海破 부분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진희 교수에 따르면 海부분의 물수변자가 너무 튀어나와서 반듯하게 일직선으로 써진 기존 글자들과 너무 다르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진희 교수에 따르면 처음 발견됐을 때 일본이 석회를 발라 비문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사실은[편집]

1984년 위 주장이 반박되는데 중국 학자 왕젠쥔에 따르면 비문이 석회를 바른건 일본 육군참모부가 아니라 처음 발견됐을 때 중국 농민들이 비문의 탁본을 찍어 파는 과정에서 울퉁불퉁한 면 때문에 잘 안 찍혀서 석회를 발라 메꿨다고 한다.

또다른 주작설[편집]

而倭以辛에서 倭가 원래는 後였다는 학설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而倭以辛卯年來이 원래는 以後以辛卯年不로 "원래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우리의 속민이라서 조공을 해 왔었는데, 신묘년 이후로는 조공을 안 했으므로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신라를 격파해서 다시 신민으로 만들었다"라고 해석이 된다.

각주

  1. 해석에서 '쳐부수고'가 신라의 앞에 붙어 신라는 직접적으로 토벌하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