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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로원과 시민들

Senatus Populusque Romanus

시대 로마 왕정 (BC 753~ BC 509)
로마 공화정 (BC 509~ BC 27)
로마 제국 (BC 27~ AD 476)
서로마 제국 (AD 285~ AD 480)
동로마 제국 (AD 330~ AD 1453)
고대 로마의 정치 정치 제도

상임 정무관
비상임 정무관
고대 로마의 군사 무기
군대
전쟁사
군사역사
고대 로마의 지리 로마
로마의 도
고대 로마의 문화 문화
사회 질서
종교
언어
학자
화폐

개요[편집]

로마의 왕정, 공화정, 제국 그리고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군대이다. (exercitus Romanus) 주석너무많다. 좀 지워죠

군단장[편집]

집정관, 법무관으로 일했던 관료들만이 군단장으로 일할 수 있었으며 군단장의 임기는 3~4년이였다.

BC 27년부터 아프리카를 제외한 군단이 한 개가 주둔할 시 그 군단의 군단장은 그 지역의 총독역할을 하였다.[1][2]

두 개의 군단이 주둔하고 있을 시에는 군단장 두명 외에 따로 총독을 한명 더 두었다.

군단장은 사소하게는 아침 조회, 사열식 등을 감독했고 크게는 건설 총감독, 군사 재판, 회계 감사까지 많은 일을 하였다.

군단장의 명령이 아무리 얼탱이가 없어도 복종해야했는데 예로 시리아의 총독이였던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Gnaeus Calpurnius Piso)의 사례가 있다.

두 병사(임의로 A와 B)가 함께 휴가를 갔다가 돌아왔는데 병사 A만이 돌아왔다.

이에 피소는 네놈이 B를 죽인 것인 것이 틀림 없다며 마녀사냥을 시전하였고 억울한 A는 곧 올 것이라며 기다려달라 간청을 했지만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중 돌아오지 않았던 병사가 돌아왔고 백부장은 사형을 중지, A와 B를 피소에게 데려간다.

이를 본 피소가 하는 말. " 두 병사 모두 사형을 집행하라. A는 살인을 하지 않았고, B는 살인을 피했기 때문이다."

이런 어이 없는 말과 함께 두 병사 모두 목이 날라갔으며 사형집행을 중지한 백부장마저 명령불복종이란 이유로 목을 날린다.

좀 극단적인 사례지만 위 사례처럼 군단장의 명령은 절대적이였다.[3]

무장[편집]

로마군이 지급 받는 장비는 방패, 투구, 글라디우스(단검), 필룸(제정 말기엔 베르툼), 갑옷, 벨트, 군화가 있다.

이는 군단의 장인들이 만들거나 민간 대장간에서 개인적으로 구해야했지만 4세기부터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곳에서 통일된 무장으로 지급받았다.

징집[편집]

로마 왕국 시절, 전쟁이 나면 왕이 시민들을 모아 싸우고 전쟁이 끝나면 바로 해산하였다.

이후 로마의 7왕 중 6번 째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때부터 징병제으로 바뀌게되었다.

전쟁이 나면 거리 곳곳에 트럼펫이 불었고 이 소리를 들으면 카피톨리움 언덕[4]으로 갔다.

징병관인 집정관이 징집조사를 하는데, 이름과 사는 곳[5]을 묻고 명부에서 확인, 신체 조건을 조사하면 끝이였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17~47세의 나이이며 시민권을 갖고 있고 자비 무장이 가능한 경제력, 장애가 없어야하고[6] 몸이 건장한 것이 조건이였지만 때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경되었다.

로마군의 신체조건은 최소 173cm[7]이였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그럴리가... 일반적으로 165cm라고 추측한다.

그 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면제를 받았는데 손가락이 하나라도 없으면 면제였다.[8]

속주국의 시민들을 징집하면 타국 경우엔 반발하겠지만 로마는 보조군으로 징집 후 제대하면 시민권을 제공하였다.

시민권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많으며 자식에게 이어지기 때문에 아버지는 보조군, 아들은 군단병인 가정이 많았다.

하지만 값싼 수입 곡물과 잦은 전쟁으로 인해 자영농민인 병사들이 몰락해가자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군제 개혁으로 인해 무장을 나라가 준비해주니 중산층만이 아닌 가난한 시민들도 로마군으로 복무 할 수 있게되었으며 군에 복무할 때는 돈으로 월급을 지급, 제대하면 땅을 지급하여 중산층의 몰락을 막아냈으며 BC 28년엔 성인 남성 26.2명당 1명이 로마군이였고 나머지 인구들도 언제든지 징집이 가능할만큼 군사의 수를 불렸다.[9]

베게티우스(Vegétĭus)에 따르면 신병은 군대 마크(문신)를 새겼다고 한다.[10]

군 복무 기간[편집]

개혁 이전엔 징집 후 복무기간이 6년이였으나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뀌고 복무기간이 16년으로 늘어났다.

술라의 로마 진격 이후 내전기엔 복무기간이 다시 6~10년으로 줄었으나 아우구스투스가 정권을 잡고 다시 16년으로 늘렸다.

거기에 베테랑으로 4년을 추가 복무하게 하였는데 베테랑으로 복무시 다양한 혜택과 면제가 있었다.

이후 복무기간이 20년에 베테랑도 5년 추가 복무하게 되었고 점점 베테랑과 일반 군단병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사실상 복무기간은 25년이 되었다.

초창기의 로마는 멀리가도 이탈리아 내였지만 확장 이후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아프리카로 파견되는 경우가 많아 6~7년은 지나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복무 중 주둔지의 여성과 눈이 맞아 제대한 후에도 정착 할 수 있어 본토에 있는 부모와는 반 영구적으로 헤어질 수 있었다.

입대 과정[편집]

청년들은 징집 후 마르스 광장으로 모이고 집정관은 카피톨리움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에 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조[11]를 받았다.

이후 군인 선서식, 행동 지침을 낭독하고 천부장이 백부장을 뽑았다.

왕정기에는 공적을 쌓을 수록 승진하여 뽑혔지만 공화정기부턴 이전에 백부장을 했어도 안뽑힐 가능성이 있었다.[12]

ㄴ잠깐, 내가 로알못이라 그러는데 순서상 공화정이 폐지되고 난뒤에 제정이 수립된것 아니었나?
ㄴ 이전에 적은 사람이 왕정하고 제정을 착각한 듯. 왕정으로 시작햇다가 왕정을 엎고 공화정으로 이어진 뒤, 다시 제정이 됨.

백부장이 정해지면 백부장은 백인대를 구성하는데 구성 기준은 그냥 자신이 서있던 열의 병사, 아니면 같은 고향의 병사들로 특별한 기준은 없었다.

백인대가 정해지면 무기가 지급되었다.


공화정말고 제정도 알려줘라.. 오직 로마시민권자들만 갈수있었냐?

ㄴ맞음. 병력 충당이 의심스럽겟지만, 그 때 되면 로마 전역에 식민도시라던가 그런 게 많이 세워져서 오히려 수도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가 텅텅 빌 정도가 됨.

훈련[편집]

their exercises unbloody battles, and their battles bloody exercises.

로마군의 훈련은 피를 흘리지 않는 전투였고, 전투는 피를 흘리는 훈련이었다.[13]

 
— Flavius Josephus[14]

모든 로마군은 입대 후 4개월간 기초 훈련을 받았다.[15]

처음엔 보폭훈련과 행군훈련을 했다고한다.

행군 훈련은 한 달에 3번있었으며 보통 14.8km를 걸었다.[16]

그 외에 체력훈련[17], 대형훈련, 투창훈련, 기병훈련[18] 등을 하였으며 잘 못했을 경우 채찍을 맞았다고한다.

BC 105년부터 검투사들에게 로마군을 훈련시키게 하면서 나무 무기가 지급되었다.[19]

대인전투 훈련을 할 때는 알마투라(armatura)라고 부르는 1:1 훈련을 했는데 이 때는 실제무기와 비슷한 무게의 무기로 훈련을 했다고 한다.[20]

기병들은 보병과 같은 훈련에 다양한 승마술을 배웠으며 훈련기간은 자료가 적어 모른다.

훈련시험을 할 때는 총독 등 고위 인사들까지 오는데 여기서 합격하면 평소 배급 식량의 2배를 받지만 떨어질 경우 밑의 형벌항목과 같은 곡물을 보리로 받는 불명예를 얻었다.

시험을 통과해도 훈련은 하루에 2번씩 계속 하였다.

군생활[편집]

로마군은 매일 아침 사열식을 하였으며 오늘의 암호를 전달하였다.

한 가지 예로 군단장을 몰라본 병사가 암호를 대라고 했는데 마침 군단장이 암호를 잊어 말을 못하자 군단장을 공격한 사례가 있다.[21]

로마군은 12~1시까지 오침시간이 있다고한다.

경비와 순찰은 약 200여명이 하였으며 절차가 철저했다고 한다. 이는 밑의 형벌항목의 경비쪽을 보면...

10일에 하루 비번이였으며 1년에 5일 정도 휴가를 주었다.[22]

로마의 축제일은 플레베이 대축제 등 축제, 유피테르 등의 각종 신들의 경축일, 황실 가족의 생일, 군단 설립일 등 1년에 축제일이 43일이 넘었으며 이런 날엔 검투사, 악사 등을 주둔지로 불러 같이 축제를 즐겼다.[23]

하지만 이런 축제일과 휴일을 제외하곤 로마군은 전쟁 등의 임무가 없다고 놀지 못했다.

로마는 군단이 그냥 논다면 정치와 돈에 관심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결과 계속해서 굴리게 되는데 하다하다 일이 없으면 각종 건설 작업까지 시켰다.

하지만 백인대장의 재량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뇌물을 먹이면 면제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죽창 주욱창을 들어라

급료[편집]

급료에 대해 말하기 전에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데나리우스로 통일해서 서술했다.

데나리우스의 화폐가치를 알고 싶으면 데나리우스 항목 참조. 쉽게 말하면 1데나리우스에 빵이 16개이다.

로마군은 1년에 급료를 3번 받았다.

처음 받는 급료를 비아티쿰(viátĭcum)이라하는데 보조군의 병사는 75 데나리우스를 받았다.[24]

제 1차 포에니 전쟁(264~241 BC) 당시 보병의 연봉은 120데나리우스였다.[25]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시절인 AD 84년의 자료엔 군단병에게 297드라크마를 받았고 보조군 기병은 247드라크마를 받았다고 한다.[26][27]

카이사르는 병사의 일당을 5 아스(As)에서 10 아스로, 2배나 올렸고 아우구스투스 때도 이를 유지, 연봉은 225 데나리우스였다.

이 후 11대 황제인 도미티아누스까지 약 100여년이 넘도록 연봉이 유지되다가 300데나리우스로 인상, 또 다시 동결되었다가 20대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500 데나리우스로 올린다.[28]

하지만 연봉만 지급받는 것은 아니였다.

원정을 가면서 약탈하는 자금도 있었고 보너스, 상여금도 있었다.

예를 들어 AD 40년, 3대 황제 칼리굴라는 브리타니아 원정 실패 이후 모든 군단병들에게 100 데나리우스씩 주었다.

그 외에 클라우디우스 이후로 황제가 즉위하면 군단병들에게 상여금을 돌렸다.[29]

그리고 군단병들은 3년에 한 번씩 보너스를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돈은 부족했는데 예를 들어 AD 70년의 군단병은 225 데나리우스를 받았지만 식량값 -60 데나리우스, 장비값 -50 데나리우스하고 남은 돈 115 데나리우스만 받았던 것이다.

3년에 한 번 받는 보너스 75 데나리우스를 3 나눠봤자 1년에 140 데나리우스이다...[30]

제대 급여, 퇴직금으로 3000 데나리우스를 주었는데 21대 공동 황제인 카라칼라 때는 5000 데나리우스로 상향되었다.[31]

그러나 저 보너스 상여금도 전투에서 공을 세운 소수만 받는 포상이고, 기타 약탈 등의 수입도 로마가 확장을 멈추면서 의미가 없게 된다. 뭐 어딜 쳐들어가야 뺏고 노예로 팔아먹든지 하지.

게다가 설령 침공을 한다고 쳐도 조직력이 좆밥이라 비교적 이기기 쉬운 게르만 애들은 당연히 똥수저들이라 수익이 안나고, 금수저들인 동방 제국은 로마 못지 않은 문명국이기 때문에

싸워서 이기기가 힘들다.

황제가 새로 즉위해서 상여금이라도 뿌리려면 황제가 빨리 뒤지고 새 황제가 즉위해야 하는데 계승에 하자가 없다면 재위기간도 존나게 길어지니 기회도 없다.

내전기라면 이놈저놈이 다 황제라고 꺼드럭 거리면서 지지율 확보를 위해 돈이라도 뿌리겠지만 같은 로마군이랑 싸워야 해서 졌다간 말그대로 끝장이다.

제 1대대 백인대장은 일반 백인대장보다 2배를 더 받았다.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는 675 데나리우스를 받았다.

보조군의 급여에 대한 사료는 부족한데, 부대마다 급여가 달랐다고 한다.

현대 사학자는 약 100 데나리우스 정도를 받았다고 추측한다.

이동[편집]

보조군(투창병&궁수)-보병&기병-기술자-군단장&호위병-기병-군단기수-트럼펫 취주자-군단-군수품-용병-보병&기병 순으로 행군했다.

로마군은 타국보다 신속하게 전쟁터나 발령받은 주둔지로 갈 수 있었는데 이는 도로가 잘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군들이 이동을 할 때는 그의 부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32]과 잡상인, 창녀들이 같이 이동을 하였다.[33]

이동할 때 민간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동하였는데 이 때문에 해가 지면 임시 주둔지를 건설해야했다.[34]

주둔지를 건설하지 못할 경우 돈을 주고 민가나 여관에 묵었으며 정 여의치 않으면 길바닥에서 자야했다...

군장의 무게는 약 50kg 정도였으며 스쿠툼, 갑옷 외의 구성품으로는 주로 식기, 톱, 곡괭이, 삽, 말뚝 등이였다.[35]

식량은 주로 3일분을 가져갔지만 발령받은 주둔지가 멀 경우엔 최대 17일분의 식량을 챙겨간 적도 있었다.

막사와 같은 무거운 것은 분대마다 한 마리 씩 배당된 노새가 싣고 다녔다.

주둔지[편집]

주둔지는 보통 식수를 구하기 쉬운 강 근처나 농지 부근에 자리잡았다.

장소가 결정되면 측량사들이 측량을 하고 병사들은 땅을 고르고 주둔지 바깥에 참호를 팠다.

참호가 완성되면 방책과 망루를 만들었다.

다만 모든 병사들이 건설에 동원 되는 것은 아니였고 상황에 따라 수를 나눠 교대로 경계와 일을 하였다.

이렇게 다 하는데 오래걸릴 것 같지만 1~2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36]

철거할 때는 정리 후 불을 질렀다.

위는 임시 주둔지일 때의 경우고 상비군, 정식 주둔지일 경우 석재로 만들었다.

여러 군단이 이용하는 주둔지일 경우 부지가 약 20만평이였는데 이는 잠실구장의 25배나 되는 크기이다.

주둔지는 공장, 곡창, 병원, 목욕탕 등 다양한 시설도 있었다.

유럽의 일부 도시는 로마군 주둔지가 도시화 되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쾰른, 콜체스터 등등.

상과 벌[편집]

전쟁 후 공훈을 치하할 때 최종결정은 황제나 원로원이 결정하였다.

흔히 생각하는 월계수는 1급 백부장 이상만 받을 수 있는 관인데 이 것과 부상으로 금은으로 만든 군기, 장신구를 받고 한계급 승진을 했다.

위가 가장 큰 공훈을 세운 병사가 받는 상이며 그 다음가는 공훈을 세운 자는 오크[37]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관과 부상을 받았다.

그 후에 각종 상을 받았으며 끝에는 적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힌 병사까지 다 주고 상으로 받은 것들은 제대 후에도 훌륭한 자랑거리가 되었다.

명령불복종, 투항 등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했을시엔 벌금과 모욕을 주었다.

이러한 군단의 군단장, 기수[38]는 벌금으로 그치지 않고 불명예제대나 강제 전출 등을 당했다.

식사[편집]

주로 곡물, 빵과 고기, 올리브유와, 치즈와 포도주를 마셨다.

포도주는 물에 탄 포도주인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당시 포도주는 숙성 항아리(토기)에서 수분이 빠져 농축이 되었기 때문에 걸쭉하고 진해서 물에 타먹는 것이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헬조선 군머처럼 양 불리려고 비리 저지르거나 한 건 아님.

그리고 의외로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ㄴㅈㄹ하고 있네 시오노 나나미가 처쓴 소릴믿네. 고기를 싫어한 게 아니라 없어서 못먹은 거다 동서를 막론하고 일반 평민이 유목민이 아닌한 고기를 섭취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평소 닭을 키우거나 사냥 ,낚시를 통해 고기를확보했다. 고기를 싫어하면 장비 중 (고기 꽂아서 구워먹는 데 쓰는) 꼬치가 있던건 뭔데??
ㄴ 애초에 시오노 할매는 고대 로마를 좆본(정확히는 좆본제국)하고 지나치게 겹쳐보는 국뽕(우리가 보면 일뽕)이라서 그런 식의 오류를 존나 많이 저지름.

놀이[편집]

로마의 병사들은 주로 주사위 3~4개를 던져 그 수의 합이 높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을 하였다.

그 외엔 밑의 기차놀이 정도... 진짜 존나 재미없게도놀았다

ㄴ 너 급식충이지? 그 시절이 지금하고 같냐? 허구헌날 전쟁하러 돌아다니는 로마군이 간편하게 갖고 다닐 수 있는 장난감이 얼마나 될 것 같냐?

성욕 해결[편집]

위의 이동 항목에서 말했듯이 로마군들이 이동을 할 때는 그의 가족과 창녀들이 같이 이동을 하였다.

로마군들은 부대 밖으로 나와 부인과 창녀들로 성욕을 해결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부대 밖으로 나갈 수 있기가 어려웠다.

이에 병사들은 우애와 단결력이라는 이름으로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뒤를 탐하게 되는데...

지금의 군대가 그런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당시엔 쌍방 간의 합의가 있었으면 OK였다.

심지어 장교들도 그랬는데 이렇게 총애를 받게 되면 군생활도 편해지고 서로 윈-윈한 셈이였다.

다만 유혹에 넘어오지 않자 강간하려는 사례도 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조카인 가이우스 루시우스는 트레보니우스라는 쌔끈한 병사를 따먹기 위하여 유혹했으나 넘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 루시우스는 트레보니우스를 불렀고 강간을 시도하려고 했고 기겁한 트레보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인 루시우스를 칼로 죽였다. 난 죽이고 싶어 너를!

이를 안 마리우스는 군사재판을 하였는데 루시우스는 원래 군단에게 평가가 좋은 인물이였고 트레보니우스를 비난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트레보니우스는 사건의 내막을 모두에게 말해주었고 마리우스는 무죄를 선언했다.

이러한 사례처럼 로마인은 동성애 풍습이 있었지만 저 당시엔 동성애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39]

어후 시발

march......

보병 진형과 명령[편집]

가장 유명한 테스투도는 라틴어로 거북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방어대형 중 하나를 말한다. 일명 귀갑진.

스쿠툼을 든 병사들이 외형을 둘러싼 후 대형의 중앙에 들어간 보병이 방패를 모두 위로 올려 적의 화살과 투창을 막는 효과적인 대형이였다.

언제부터 사용한 대형인지는 모르나 플루타르코스는 BC 36년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사용했다고 서술하였다.

테스투디넴 포르마테(testudinem formate) 명령이 내려지면 테스투도 진형을, 반대로 테콤브레(tecombre) 명령이 내려지면 테스투도 진형을 해제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쐐기진(Flying wedge)과 같은 진형의 명령은 쿠네움 포르마테(cuneum formate)로 충격을 주어 적의 진형을 깨트리는 대형이다.

사각형 진형과 비슷할 것으로 여겨지는 대기병진의 명령은 레펠레레 에퀴테스(Repellere equites)이다.

방패와 방패 사이에 창 또는 필라를 드는 대형이라한다.

형벌[편집]

로마군은 다양한 형벌이 존재하였다.

먼저 탈영, 탈영을 할 시에는 푸스투아리움을 했는데 이 것은 쉽게 말하면 패죽이는 것이다.

푸스투아리움은 그 외에 도둑질, 거짓 증언 등 불명예스러운 일이 있을 때 행하는 형벌이였다.

그리고 발 채찍질인데 이 것은 현대의 고문 기술에도 있을만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형벌이다.

그 외의 범죄에 관한 형벌로는 군단 앞에서 채찍질하기, 뱀의 자루에 넣어 강이나 호수에 던지기, 벌금 등이 있었다.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인한 형벌도 있었는데 배급 식량을 보리로 주기, 추가업무, 계급 강등 등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죄인 반란에 대한 형벌로는 데시메이션(decimation)이 있다.

병사 10명 중 9명이 1명을 때려 죽이는 것인데 죽음을 당하는 1명은 무작위로 선정이 되었다.

살아남은 9명의 병사들은 평상시 배급 받던 곡식 대신 보리를 받았다.

이 형벌이 처음 적용된 것은 BC 417년, 볼스키인과 전쟁 중 병사들이 이틀 연달아 도망가자 이 형을 내린 기록이 있다.

연대책임의 극치인 이 형별은 흔하지 않은 벌이였으며 이를 강행했을 경우 병사들의 사기가 극도로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카이사르 등 많은 장군들이 형을 내렸다가 취소하였다. 반대로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 진압할 때 연패로 사기가 이미 바닥난 군대를 분발시키기 위해 쓴 바 있다.

같이보기[편집]

군단병

백인대장

이탈리아군 - 로마군의 덜떨어진 후손


  1. 아프리카는 황제의 직속령
  2. 시민들을 다스리는 민정총독도 따로 있었다.
  3. 사족이지만 이후 피소는 게르마니쿠스 독살사건 때 연루되어 모가지가 날라간다.
  4. 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곳
  5. 로마는 5년에 1번 가정의 가족 수, 연령, 재산을 조사하는 호구조사를 했다.
  6. 고자는 상관이 없었다!
  7. 4세기 기준
  8. 그 중 무기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엄지 손가락이 가장 중요했는데 병역을 면제 받기위해 엄지손가락을 잘라냈다고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자 4세기 말에는 엄지손가락이 없어도 입대시키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9. 하지만 돈을 지급하는 사람이 군단장이라 군의 통제권이 지나치게 군단장에게 가고, 왠만해선 똑같은 군단의 군단장으로 복무했기에 사병화를 불러오고 내전의 확률이 증가하였다.
  10. 이는 탈영방지 때문으로 보인다.
  11. 점괘의 일종으로 이를 못받는다면 전투에서 승리하여도 개선식을 할 수 없었다.
  12. 하지만 이의를 제기 할 수도, 번복할 수도 없었다.
  13. 한국에서는 로마군의 훈련에 대해 이 문장을 주로 인용하지만 해외에서는 When not campaigning, legionary training and preparation, almost as hard and as expensive as war, consumed the Roman army를 더 자주 인용한다.
  14. 제 1차 유대-로마 전쟁의 지휘관이였으며 유대 전쟁사의 저자이다.
  15. 공화정까지만해도 밑에 서술한 훈련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16. 여름엔 특별 훈련으로 29.6~35.5km를 걸었다.
  17. 멀리 뛰기, 수영 등을 말한다.
  18. 보병도 신체 단련의 일환으로 훈련하였다.
  19. 실제 무기보다 2배나 무거웠다고 한다.
  20. 원래는 검투사의 전투기술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21. 그 군단장의 이름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이다... 아프리카 원정 중의 일이다.
  22. 이런 날에 나가서 주둔지 근처의 가족들을 만났다.
  23. 물론 임무를 마치고 축제를 즐겨야했다.
  24. 군단병의 비아티쿰에 관한 자료는 아직 없다.
  25. 기병은 그의 2배를 받았다.
  26. 드라크마는 데나리우스와 가치가 똑같다고 보면 된다. 둘 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였기 때문.
  27. 이 때는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올랐었다.
  28. 약 100년 주기로 인상하는 안습한 병사들...
  29.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이후로 사라졌다.
  30. 보조병은 보너스도 못받았으며 순수익은 약 78데나리우스였다.
  31. 만기 제대만 해당
  32. 로마 군단병은 복무중엔 결혼이 인정되지 않아, 부인들도 전부 '정부'(情婦) 취급을 당햇다.
  33. 어떨 때는 이들이 군단보다 많았다고 한다.
  34. 하지만 에픽테토스가 아리아노스에게 징발당해도 가만히 있으라는 편지를 보낸 것을 보면 꼭 해를 끼치지 않은 것 같진 않다.
  35. 마리우스 이후부터 군장의 무게가 늘었는지 저렇게 된 후 마리우스의 노새라고 불렀다.
  36. 주둔지만 적었지만 그 외에 다리도 만들고 별 거 다 만든다. ㄷㄷ
  37. 떡갈나무의 일종
  38. 군단기를 잃어버렸을 때. 이는 매우 큰 중죄다.
  39. 동성애는 그리스문화에서 온 것인데 이방의 풍습이라며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로마인은 자신이 탑, 즉 박을지언정 박혀서는 안됐다. ? 위랑 모순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