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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언 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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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지. 저 여자(릴리언 기시)덕택에 클로즈업이 발명된건데" - 베티 데이비스


1910년대를 상징하는 여신


소개[편집]

무성영화 시대부터 20세기 후반까지 배우생활을 이어간 명실상부 전설의 배우.

사실상 전설의 여배우 시초로 이 뒤를 오드리 헵번, 잉그리드 버그만 등이 잇는다.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에 최초로 등재된 인물. 심지어 최초의 여배우도 아니고 '최초 배우'다.


1910 - 20년대를 주름잡았으며 수명이 짧은 일반적인 여배우들과 달리 무려 75년간 배우 생활을 이어갔다.

마지막 영화는 베티 데이비스와 주연으로 찍은 '8월의 고래'로 이때 릴리언 기시의 나이가 무려 94세 였다.


스타일[편집]

활동 범위가 75년이나 되지만 실제 주 무대는 무성영화시대였다.

'1910년대 그 자체'로 불릴만큼 견고한 아성을 자랑했지만 1920년대에 들어선 조금씩 전성기에서 내려오게되는데


순수하고 성스런 매력을 발산하는 빅토리아조 시대의 상징이었던 1910년대와 다르게

1920년대는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고 전폭적인 사회진출이 이뤄지던 시기기에 순종적이고 처녀적인 릴리언 기시의 이미지와 부합되지 않았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도 20년대까지 주름잡았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릴리언의 연기력, 몰입력을 대체할 여배우도 없었고 워낙 아성이 견고했기 때문.


하지만 1930년대 들어 유성영화시대로 접어들자 릴리언도 스크린에서 차차 내려와 연극무대로 돌아가게 된다.

스스로 무성영화에 대한 애착이 무척 커서, 굳이 유성영화에 열심히 출연하려 하지않았기 때문.

그래도 간간히 출연하며 나이 들어선 인자한 어머니 역할등을 맡으며 전설의 행보를 이어가셨다.


무성영화의 '육체 연기'를 매우 중요시 여긴 릴리언은 영면하는 그 순간까지 무성영화에 대한 애착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요새 그냥 돈 많이 벌려고 철학이고 나발이고 발연기에 악취나는 가십거리만 풍기는 여배우들과 다르게 정말 확고한 연기철학을 지닌 대 여배우였다.


여담[편집]

여동생 도로시 기시도 유명했지만 언니인 릴리언 기시의 아성이 워낙 컸기에 조금 가려지는 감이 있다.

하지만 도로시는 전혀 질투하는 기색이 없을 만큼 우애가 깊었다고...


여담으로 릴리언 기시는 진지하고 감정적인 스타일이라면 도로시 기시는 활발하고 쾌활한 사교가 타입이었다고 한다.

유명한 록밴드 스매싱 펌킨스의 첫 앨범 '기시'가 바로 이 릴리언 기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