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카낭의 비극

이 문서는 참교육에 관련된 것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참교육의 은혜를 다룹니다.
만일 참교육을 거부할 시 성적은 개좆망행이니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헤이, 영쑤!! 돈 두 댓!"


브라질 축구팬들에게는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악의 경기로 기억되고 있다.

이 경기가 최악의 경기로 기억되는 이유는 경기력 때문이 아니라 브라질 축구팬들의 기대가 처음부터 너무 컸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우루과이전이 아직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 메달을 미리 만들고 우승 축가도 미리 만들었을 정도였다.

근데 우루과이가 우승하는 바람에 메달은 만들어지자마자 다시 용광로에 들어가서 터미네이터가 되어버렸다.

브라질의 기분[편집]

  • 아르헨티나피파가 개최시켜준다는 약속을 깬 걸로 뿔딱지가 나서 불참했다. 참고로 당시 아르헨티나는 코파를 휩쓸어버리는 등 남미최강팀이었다. 브라질: 싱글벙글 레벨 1
  • 잉글랜드미국 나부랭이한테 어처구니 없게 쳐발리고 나가 죽었다. 참고로 당시 잉글랜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실질적 최강팀이었다. 잉글랜드는 1934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 그 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를 3-2로 쳐발라버리고 덤으로 아르헨티나 출신 이탈리아 선수인 루이스 몬티를 폐기처분 시켰다. 브라질: 싱글벙글 레벨 2
  • 이탈리아 역시 수페르가의 비극을 당해 뛸 선수가 없어서 자멸하고 말았다. 참고로 당시 이탈리아는 디팬딩 챔피언이었다. 브라질: 싱글벙글 레벨 3
  • 결승리그. 브라질은 스웨덴을 7-1, 스페인을 6-1로 개박살내서 2승 득+13 실-2 차+11를 달성한 반면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2-2로 겨우 비기고 스웨덴을 3-2로 역전승해서 1승1무 득+5 실-4 차+1를 내는 바람에 우루과이전은 비겨도 우승이었다. 브라질: 싱글벙글 레벨 4

아유 종아~

그러나...

결승전[편집]

이 경기는 브라질에서 열린 1950월드컵으로 그때 브라질은 결승리그에서(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월드컵에 토너먼트가 없었던 시절이다.)스웨덴과 스페인을 너무나도 압도적이게 이기고 2승 따냈지만 그 반면에 우루과이는 브라질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겹게 1승1무를 따내던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브라질에서는 이미 우승을 한 것과 다름없던 분위기였다.


주의!! 설레발은 필패입니다!
이 문서는 설레발을 치다가 좆망한 대상을 다룹니다!
이걸 시전한 팀 치고 잘된 걸 본 적이 없으니 늘 항상 조심합시다!!
이 문서는 줘도 못먹는 대상을 다룹니다.

이 문서는 제발 좀 먹어라 하면서 대놓고 떠먹여 줘도 그걸 또 못쳐먹거나 거부하는 불쌍한 대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문서를 반면교사로 삼아 당신은 천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천금같은 기회를 이런 바보들처럼 차버리지 않길 바랍니다.
주의! 이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은 병신입니다.
그냥 개좆병신 그 자체입니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이 망하는 것은 쌤통입니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온갖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놈들입니다. 그렇기에 천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따잇^

하지만 막상 경기에 들어서자 브라질은 의외로 우루과이에게 고전하고 있었다. 그래도 후반전에 들어서 먼저 선제골을 넣은 것은 브라질이었고 브라질은 무승부만 해도 우승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승을 확정짓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 우루과이가 동점골과 역전골을 연이어 넣고 승리하였다. 이로인해 브라질은 충격에 빠졌고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50여년 뒤 미네이랑의 비극 같은 눈썩는 꼬라지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과[편집]

원래 브라질의 유니폼은 다음과 같았다.

  • 상의: 흰색 유니폼에 어깨에 파란 세로줄이 그어져 있었다.
  • 하의: 흰색
  • 양말: 흰색

그런데 마라카낭의 비극을 당한 유니폼이 저주받은 유니폼이라면서 유니폼을 이렇게 갈아치웠다.

  • 상의: 노란색
  • 하의: 파란색
  • 양말: 파란색

그리고 선수들 전원을 물갈이했고 특히 이 경기에서 브라질 골키퍼로 뛴 모아시르 바르보사패배를 부르는 선수라는 오명 때문에 제대로 된 팀에서 뛰기 힘들어졌다. 은퇴 후에도 감독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스포츠 해설자 자리마저 거절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였다. 바르보사는 이 경기 이후 딱 50년을 더 살았는데 그 기간이 징역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했다.

1950년 월드컵에서 뛴 브라질 엔트리멤버는 니우통 산투스 1명을 빼고는 다시는 국가대표에 들어가지 못했다. 니우통 산투스는 엔트리멤버에 올라가는 있으되 이 월드컵에서 단 1초도 뛰지 않았다. 물론 니우통 산투스는 2년 넘게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하고 있다가 1953년에서야 비로서 국가대표에 다시 뽑혔다. 실제로 마라카낭의 비극때 뛰지 않고 벤치만 뜨겁게 달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 니우통 산투스는 펠레를 도와서 1958년 스웨덴 월드컵과 1962년 칠레 월드컵을 우승하면서 마라카낭의 비극때 당했던 치욕을 완벽하게 씻어내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참고로 1962년 월드컵 당시의 니우통 산투스의 나이는 2014년 월드컵 당시의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나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