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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유키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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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유키무라(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1567-1615)

본명은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보통 유키무라는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는 하지만 유키무라 딸내미가 만든 가묘에도 '유키무라'라고 쓰여있어 오사카 전투 직전에 개명했다는 얘기도 있다. 명성왕후와 더불어 인생은 한방이라는 표어에 가장 적절한 인간인 것 같지만 그래도 민자영과 비교하면 유키무라가 모욕당하는 거나 마찬가지. 그러게 왜 풍신파에 서서...ㅉㅉ 오사카 겨울의 진, 여름의 진에서 활약한 것이 유명하고...사실 이 인간이 활약한 네임드 전투가 오사카 전투 이것 밖에 없다. 특히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모리 카츠나가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에 돌격해서 도쿠가와를 죽일뻔한 일화로 유명한데 이 전투 하나로 유키무라의 명성이 일본 전역에 퍼지게 된다.

전국최강이라는 자뻑으로 유명한 가이겐지 다케다가문[1]의 가신인 사나다 마사유키 차남. 차남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독을 상속 받지 못했으니 네임드에 비해 당시 세간의 평가는 별거 없었다.(게다가 유키무라는 도요토미 가문과 연이 깊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천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당시엔 가독은 커녕 거의 은거해야 집안이 살 판) 오히려 아버지 마사유키가 군략가로 유명했는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후일 에도 막부 2대 쇼군이 되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마사유키가 2000명을 가지고 지키던 우에다 성을 공격했다. 이 때 마사유키는 항복을 할테니 성을 청소할 동안 기다려달라고 했고, 히데타다는 기분좋게 허락했는데 이틀간 기다려도 항복할 낌새가 없자 공격을 했는데 유키무라가 이 때 통로를 가로막고 1주일간 버텼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참(전장에 늦게 도착하는 것. 당시에는 목이 잘려도 할 말없는 중죄감)한 히데타다가 사나다 부자를 죽이겠다고 방방 뛰었으나 노부유키와 그의 사돈 혼다 타다카츠가 뜯어말려 유배로 그치게 된다.

처음에는 유배지를 고야산으로 지정했는데, 고야산은 금녀의 구역이라 구도산으로 바꾼다.(둘 다 현재의 와카야마 현에 있다) 형 노부유키의 배려로 행동에 크게 제약을 받진 않았지만 딸린 식구들과(당시 유키무라는 정실과 측실 자식들을 합쳐 10명이나 됐다) 가신들이 있어 생활이 쪼들렸다고 한다. 아버지 마사유키는 빚이 많으니 돈 좀 얼른 부쳐달라 같이 요구사항이 많아 형 노부유키의 골치를 썩혔는데 동생 유키무라는 형에게 미안해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 만들었던 것이 지금도 만드는 유명한 사나다 끈으로, 가신들이 사나다끈을 팔고 다니면서 돈도 벌고 주변 정세도 살폈다고. 이 당시 지인에게 '이 항아리에 소주를 좀 담아서 보내주라. 답례는 유카타용 천 하나를 주겠다.'고 보낸 안습한 편지도 있다.

그러다가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세력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낭인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한 히데요리의 사자가 구도산을 찾아오고, 이 때 황금 200매와 은 30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00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을 주었다. 이에 오사카로 입성하게 된다.

앞서 서술했듯, 사나다 유키무라의 명성을 높인 것은 분명 오사카성 전투지만 딱히 오사카성 전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아닐뿐더러, 그 영향력이나 업적도 명성에 비해 뒤졌을 꺼라고 판단된다. 유키무라가 무능했다는게 아니고 그거 쳐한 입장이 '가독도 물려받지 못한 차남+아무런 신분적 보장 없이 의기로만 오사카성에 입성한 '낭인중'(후일 오사카 5인중으로 불린다, 구성원은 사나다 유키무라, 모리 카츠나가, 고토 마타베에, 아카시 테루즈미, 쵸소카베 모리치카)의 일원인데다 오사카 전투 당시 도요토미 가문이 요도도노(도요토미 히데요시 둘째마누라이자 히데요시의 후계자인 히데요리의 생모,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의 딸이기도 하다)를 중심으로 한 가신단과 오사카성 전투를 위해 입성한 낭인중 두개로 이원화 되어 있었고, 낭인중이 계진한 대부분의 의견은 군략에 중히 쓰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유키무라는 도쿠가와 군이 진격하기 전에 후시미성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선제공격을 할 것을 요구했지만 요도도노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오사카성의 방어력만 믿고 요지부동이어서 끝내 농성전으로 흘러갔다. (요도도노가 오사카의 진 때 했던 행동들은 그야말로 트롤링 그 자체였다)

어쨌든 농성전으로 흘러가니, 오사카 성의 남동쪽이 계곡을 이용한 방벽이라 방어에 헛점이 있다는 걸 간파하고 이걸 보완하는 외성 사나다마루(真田丸)를 만든다. 적이 남쪽으로 공격해오면 사나다마루에서 협공할 의도였다. 겨울의 진이 시작되고 선봉으로 도쿠가와 측의 마에다 토시츠네(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들)과 마츠다이라 타다나오가 공격을 시작했다. 유키무라는 이 때 평원에서 이들을 도발하여 사나다마루로 유인, 집중사격으로 단 하루만에 도쿠가와 군에게 1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안겨 패퇴시키고 도요토미 측에게 대승을 안겼다. 5천명의 병력으로 얻은 값진 승리였다.

이후 도쿠가와 측의 공격은 사나다마루로 집중되었다. 당시 오사카 성의 동, 서, 북은 해자로 둘러싸여 공격이 매우 곤란했고 그나마 뚫린 남쪽은 유키무라와 사나다마루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 몇 번의 공격에도 사나다마루는 함락되지 않았는데, 이 때 사나다마루 뒤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터진다. 이걸 첩자의 신호로 잘못 파악한 도쿠가와 군은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이것도 격퇴당해 사나다마루 주변의 해자는 시체로 메워질 정도였다고 한다.

한 달이 넘도록 사나다마루를 뚫지 못한 이에야스의 심리전에 걸린 요도도노가 강화라는 트롤링을 저질러 버림으로서 오사카 성 외각의 해자는 메워지고 사나다마루는 해체된다. 여름의 진이 시작된 것이다.

유키무라는 겨울의 진 때 이에야스가 본진으로 썼던 차우스산(茶臼山)의 요새를 재활용해 제2의 사나다마루를 만들고, 모리 카츠나가, 고토 마타베에와 함께 이에야스의 주력을 유인해 묶어두는 동안 기마부대를 활용해 이에야스의 본진을 급습하는 전략을 짠다. 그런데 고토 마타베에 군이 계획보다 먼저 이에야스 군과 교전한 끝에 전사해버린다. 이에 유키무라는 어쩔 수 없이 차우스산에서 나왔다가 다테 마사무네의 기마철포대와 마주친다. 이건 마사무네가 돈지랄을 해서 만든 것으로 제법 재미를 보고 있었으나 유키무라는 유인과 매복(총에 안 맞게 바닥에 넙죽 엎드려있다가 지나갈 때 창으로 찌르는 야리부스마 작전)으로 이걸 발라버렸다. 이후 모리 카츠나가와 함께 도쿠가와 측 네임드들을 신나게 발라버리면서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이 때 이 둘에게 박살난 네임드는 다음과 같다.

- 혼다 타다토모 : 혼다 타다카츠의 차남. 전사.
- 오가사와라 히데마사 : 마츠모토번 초대 번주. 여름의 진 때 장남이 죽었고 자신도 이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 아사노 나가시게 : 5대로 필두였던 아사노 나가마사의 장남.
- 아키타 사네스에
- 사카키바라 야스마츠
- 센고쿠 타다마사
- 스와 타다츠네
- 사카이 이에츠구
- 혼다 타다츠미 : 혼다 마사노부의 삼남

유키무라는 신겐이 즐겨쓰던 카게무샤 전법을 활용해 여러 군데에서 신출귀몰하게 자신이 나타나는 듯한 혼란을 주고 총 3번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돌격을 감행했는데, 이 때 이에야스의 우마지루시(馬印, 대장이 타는 말 곁에 세워두는 깃발. 즉 이 깃발이 세워져 있다는 건 본진이고 대장이 근처에 있다는 의미다)가 넘어졌을 정도였다. 즉, 이에야스 최악의 흑역사인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래 두번째 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끝끝내 승리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후퇴하여 텐노지 인근에서 부상자 치유와 휴식을 취하던 중 이에야스의 군이 그 장소를 기습하여 전사하게 된다.

숱한 미디어매체에서 미청년으로 표현되는 인간이지만, 네임드 올렸을적 나이는 이미 40대였고 자식들도 꽤 있었다.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빨도 빠지기 시작했고 온 몸이 아프다는 말도 있을 정도. 자식들은 대부분 딸들이었고, 아들 중 장남은 함께 오사카의 진에 출진하였다가 오사카 성이 함락되고 히데요리가 자결하자 탈출을 권고받았음에도 자결했고, 삼남은 외갓집으로 입양을 보내 차남인 모리노부가 다테가를 섬겨 대를 이었다. 막부 측에서 집요하게 모리노부를 내놓으라고 다테 가에 요구를 했는데 다테 측에서는 처음에는 모리노부가 8살 때 돌 맞아 죽었다고 속였다가 나중에는 아예 유키무라의 삼촌인 노부타다의 아들이라고 뻥을 치고 숨겨주었다. 이후 모리노부는 다테가의 가신이었던 카타쿠라 성씨로 바꾸고 살았다가 아들대에 이르러 사면을 받아 사나다 성을 복권했고 오늘날의 센다이 사나다씨로 이어졌다.

이 인간이 오사카성에 입성했다는 말을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버지인가 아들인가!' 하면서 놀랐다가 가신이 아버지인 마사유키쪽은 이미 죽었다는 말을 하자 안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유키무라에 대한 과소평가로 종종 인용되지만 사실 유키무라에 대한 이에야스의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가독도 물려받지 못한 일개 낭인이던 유키무라가 할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사카 전투 겨울의 진 때 사나다마루로, 여름의 진 때 본진 급습으로 빅엿을 두 번 선물했다는 걸 생각하면 사나다라면 이를 갈았을 것이다.

좆망할 거 뻔히 아는 팀에 속해서 분전했다는 것이 높이 평가되어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열혈 바보/으리 바보 정도로 표현된다. 하지만 실제 성격은 말수가 적고 인내심이 강하며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또한 각종 일화나 전설등을 연구한 결과, 전투에는 소질이 있었지만 정치적인 능력은 꽝이었다는 게 약점. 즉 무능하고 멍청한 윗대가리들을 설득시킬 때 필요한 경험이 없었다는 게 비극이었다.

  1. 이거 때문인지 게임상에서는 허구헌날 한세대 전의 인물인 다케다 신겐을 모시면서 '오야카타사마!'를 외치며 돌격하는 열혈한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아버지 마사유키 부터가 신겐의 후계자 카츠요리를 호죠가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는 얘기가 있으니 뭐 게임상의 일이다, 실제 성품도 열혈한이라기보단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하고...다만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사나다 유키무라군이 다케타군을 연상케하는 붉은 갑옷을 입고 돌격했는데다가 유키무라 스스로도 다케다가의 카케무샤 군략을 써서 이에야스에게 돌격했다고 하니 후대에 이게 상당히 인상깊게 남은 덕인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