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아사쿠라 소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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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인물은(는) 존나 똑똑하면서 존나 셉니다.
이 문서는 천재적인 두뇌와 초인적인 전투능력을 동시에 가진 인물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인물을 상대로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습니다.

아사쿠라 제일의 네임드 무장. 물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넘버원이다.

아사쿠라 다카카게의 8남으로 태어났다. 고타로라고도 불렸고 노리카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노리카게란 이름은 증조부, 조부, 부친 모두 이어받은 적이 있는데 이를 소테키도 이어받았다. 이런 점을 비추어볼 때 소테키는 8남이면서도 적남의 대우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한다. 가문 내에서 꽤나 잘 대접받은 모양이지만 가문의 당주직은 형인 우지카게에게로 돌아갔다. 이는 부친이 사망할 당시 소테키의 나이가 고작 4살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소테키는 어릴 적부터 상당히 총명했으며 재주 역시 뛰어났다고 하는데, 덧붙여 자기가 당주직을 잇지 못한데에 대한 불만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503년에 쓰루가 성의 성주인 아사쿠라 가게토요가 모반을 획책하고 소테키에게 협력을 요구했을때 그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모반을 밀고하여 자결시켜버린 사건이 바로 그 증거이다.

소테키는 뛰어난 무장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다. 일향종의 무장봉기 세력과 맞부딪친 것이 대표적인데 이때 아사쿠라측은 8천 ~ 1만 6천 정도로 추정하고 아사쿠라와 대치한 무장봉기 세력의 병력은 약 30만을 헤아렸다고 한다. 물론 존나 과장한게 눈에 뻔히 들어온다. 30만은 뭔 놈의. 30만에 미칠 만큼의 숫자가 아니어도 한가지 확실한건 아사쿠라측이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있었던 점이다. 이들은 구즈류가와 유역 각지에서 충돌하여 몇번이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일본 전승의 일화에 따르면 소테키가 기선 제압을 위해 한밤중에 도하했고 잇키 세력은 그야말로 당황하며 와해되어졌다고 한다. 8월 6일쯤 되면 나카노고 전투에서 잇코슈가 무너져내리면서 아사쿠라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1517년에는 막부의 명령에 따라 다케다의 원군으로 출전하며 헨미씨와 노부나가씨의 반란을 제압, 1525년에는 북 오미의 아자이 스케마사를 견제하기 위해 롯카쿠 가문과 협력하여 아자이의 본거지로 출정, 1527년에는 쇼군과 간레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상락 후 미요시 나가요시와 전투(이김 ㅎ) 등등. 소테키의 활약 덕분에 아사쿠라의 입지는 매우 단단해졌고 특히 막부의 요청에 의한 출정 및 승리가 있었던 만큼 중앙에의 영향력도 확실해졌다.

1531년에는 카가의 내분을 틈타 노토 하타케야마와 함께 카가로 출전했고 1555년에는 에치고 우에스기와 함께 카가로 다시 출전하여 순조롭게 몇 개의 성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도중에 병이 나는 바람에 사망하고 말았다. 사망한 나이가 79세인데 그 나이가 될때까지 전쟁터를 누볐다는 것도 참 대단하다. 비록 당주직엔 오르지 않았지만 사실상 아사쿠라의 당주였다고 쳐도 이상할게 없는 인물이었다.

소테키가 한 대사로 가장 유명한 것은 "무사는 개란 소릴 듣든 짐승이란 소릴 듣든 무조건 이기는게 짱임" 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아사쿠라 가문의 마지막 당주인 요시카게는 점잔만 빼던 전알못이었고, 그것 때문에 결국 통수 쳐맞고 멸망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