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넥타네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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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넥타네보 1세
(기원전 380년~기원전 362년)
테오스
(기원전 362년~기원전 360년)
넥타네보 2세
(기원전 360년~기원전 343년)
이집트 제30왕조의 파라오
테오스 넥타네보 2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제31왕조 파라오
재위기간
기원전 360년 ~ 기원전 3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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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기원전 380년 ~ 알 수 없음

이집트 제3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이집트 역사상 마지막 고대 이집트인 출신 군주이다. 이 사람 이후부터는 두 번 다시 이집트 토착민이 이집트를 통치하지 못했다.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대 이집트인은 여러 민족과 융합되다가 최종적으로는 아랍인에 동화되었다. 현재 이집트를 지배하는 압델 파타 엘 시시도 결국 아랍인이니까

이집트식 이름은 나크트호르헤브로 호루스의 가장 강한 하수인이라는 뜻인데 그리스인들이 듣기에 할아버지인 넥타네보 1세랑 이름이 유사했던지 다른 이름이지만 넥타네보 2세로 기록이 남았고 현대까지 그렇게 전해진다.

치세[편집]

즉위 이전[편집]

기원전 380년, 30왕조가 창건되는 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넥타네보 1세의 아들인 차하피무였다. 기원전 362년 삼촌 테오스가 즉위했으나 그가 가나안 지역 원정을 떠나기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고 넥타네보 1세 때 신전에 기부했던 금액까지 바치라고 요구하자, 이집트 전역에서 실망을 샀고 이 틈을 이용해 테오스가 원정을 떠난 기원전 360년에 아버지 차하피무가 사제 계층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버지의 설득을 받아 대관식을 치르고 파라오를 칭하게 된다. 외국에 나가있던 테오스는 끈떨어진 신세가 되어버려 갈 곳이 없자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로 망명했으나, 후에 이집트에서 신병 인도를 요구하자 페르시아는 순순히 내줬고 처형되었다.

이집트의 부활을 시도한 파라오[편집]

과거 29왕조가 일어났던 멘데스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 테오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대규모로 직접적인 대외 원정은 자제하는 대신 레반트 일대의 도시국가들과 밀당을 하는 '스마트'한 방법을 이용했다.

넥타네보 2세는 종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했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신전을 100개나 넘게 새로 지었고, 원래 있던 신전에서도 계속 재건 활동이나 이름 남기기를 하면서 지금 남아있는 여러 이집트 신전에 넥타네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서 후계 다툼으로 인한 혼란이 수습될 조짐을 보이자, 전쟁 각이 보였고 이를 막기 위해 이집트군을 강군으로 성장시켰고 그리스에서 용병을 고용하며 전쟁 대비를 했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 기원전 358년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페르시아의 분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했다. 기원전 350년대 내내 이집트와 페르시아 사이에서는 갈등이 커져갔고, 기원전 351년 결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집트-페르시아 전쟁[편집]

1차 전쟁에서 이집트가 이미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을 포섭해놓은 덕분에 페르시아군을 방해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군은 결국 시나이반도를 넘어서 나일 강 근처까지 진격해왔으나, 기원전 350년에 이집트군에게 격퇴당했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군은 다시 회군했다.

이후 넥타네보 2세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이 커진 반면 페르시아에서는 국격이 사르르 녹으면서 반란이 늘어났다.

기원전 343년, 페르시아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뛰어난 능력으로 반란을 모두 제압하고, 이집트가 지원해주던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을 쳐부쉈다. 이때 시돈이라는 도시국가를 초토화시켰고, 한때 키루스 2세의 자비를 받아 문화를 유지했지만 이제는 페르시아를 배신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에도 잔혹한 복수가 이루어졌다.

이집트의 넥타네보 2세도 나일 강변에서 여러 요새를 쌓으며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페르시아군이 나일강 근처로 다가오자 페르시아군과 이집트군이 격돌했다. 문제는 페르시아와 달리 이집트군에는 경험 많은 장군들이 부족했고 노련한 페르시아 장군들은 이집트의 약점이 어느 부분인지 꿰고 있었다. 결국 이름이 남지 않은 전투에서 이집트가 패배했고 멤피스로 파천했다. 유일한 방법은 이제 지구전 뿐이었으나 이집트군의 구성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이집트군은 그리스 출신, 누비아 출신, 리비아 출신 등이 전부 짬뽕된 상태였는데, 페르시아의 그리스인 군대를 이끌던 로도스 출신 멘토르가 이 약점을 간파하고 이집트군의 내분을 야기했다.

이 작전은 성공해서 이집트군은 자기들끼리 내분이 일어나 성문을 활짝 열어버리는 사태가 줄줄이 터지자 결국 61년간 이어진 이집트의 독립기는 끝나고, 이집트 제31왕조가 들어서면서 2차 페르시아 지배기가 열렸다.

빤쓰런 이후[편집]

펠루시움 전투에서 대패한 넥타네보 2세는 상이집트를 거쳐 누비아로 망명했고, 기원전 338년쯤 페르시아에 대항한 카바쉬라는 반란자의 도움을 받았다. 이 카바쉬는 기원전 335년쯤까지 이집트에서 반란을 이끌었는데 이 때 카비쉬가 파라오를 자칭한 유물이 나오고 넥타네보 2세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그 다음해인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군대가 이집트에 입성했다.

수많은 이집트인들에게 존경받던 넥타네보 2세가 한순간에 날라가고, 페르시아의 2차 지배기가 시작되어 10년간 폭압적인 통치를 받다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진입으로 해방되자, 최후의 토착민 파라오인 넥타네보 2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한 가지 전설이 생겨났다. 바로 넥타네보 2세가 그리스로 넘어가서 알렉산더 대왕을 낳았다는 전설이다.

넥타네보 2세가 도망간 곳이 누비아가 아니라 사실 마케도니아 왕국이었고, 여기서 필리포스 2세의 Waifu였던 올림피아스와 몰래 섹스해서 알렉산드로스 3세를 낳았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시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집트에 입성할 때 이미 사춘기라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분위기를 타고 널리 퍼져서 중세 시대까지 유럽에서 전설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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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기원전 4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