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편집]

조선 시대 소론남인이 좆망하는데 가장 직접적인 원흉이 된 군사 반란. 그리고 경상도가 헬로 다운그레이드 되기 시작한 단초를 제공했다.

이 반란의 시작은 신임옥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임옥사는 소론이 지들의 최고존엄이었던 연잉군을 권력 핵심으로 후계자를 빙자한 실권자로 벌크업 시키기 위해 경종을 상대로 협박, 강요를 반복한 노론을 참교육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정계는 경종과 소론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경종이 4년 만에 요단강 프리패스 티켓을 끊고 연잉군이 왕으로 집권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영조는 자신의 측근들인 노론을 갈아버린 신임옥사를 재조사하여 소론을 패고 노론을 다시 정계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 등의 소론 내 과격파는 갑술환국으로 찌그러지고 훗날 실학으로 이름을 날리는 남인들을 포섭하여 무장 봉기를 계획하여 영조 암살과 노론 숙청을 도모했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기에 앞서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카더라 통신을 퍼뜨렸고[1] 자신들의 새로운 왕으로 소현세자의 증손자(밀풍군 이탄)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으며, 1725년(영조 2년)부터 반란에 응할 인물들을 각지에서 선별했다.

이 반란에 서울의 이하(李河)·양명하(梁命夏)·윤덕유(尹德裕) 등, 안음 출신 정준유(鄭遵儒[2]), 은진 출신 나만치(羅萬致), 여주 출신 조덕규(趙德奎), 이천 출신 임서호(任瑞虎), 안성 출신 정세윤(鄭世胤)[3], 진위 출신 이호(李昈), 충주 출신 민원보(閔元普)와 이인좌(李麟佐)[4], 청주 출신 신천영(申天永), 상주 출신 김홍수(金弘壽), 과천 출신 이일좌(李日佐),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 금군별장 남태징(南泰徵) 등이 반란에 호응했다. 이놈들은 경종의 임종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던 심유현[5] 의 폭로와 적절히 섞고 경종의 사망에 대한 음모론을 퍼뜨리면서 여론을 흔들었고 집에서 노비들과 집안 하인들을 무장시키고 명화적 등을 군대로 동원하기로 결심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내 온건파가 정계 복귀를 시작했는데, 그들 중에서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 양성 출신 김중만(金重萬) 등이 소론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꼰지르는 덕분에 더 이상 반란에 끼워넣을 인사 영입도 어려워지고[6] 자신의 부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평소에 심하게 자극 받던 영조가 "소론 새끼들 다 때려부숴버려!"라고 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경과[편집]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하면서 반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청주성을 점령한 이인좌는 절도사 이봉상(李鳳祥)[7], 토포사 남연년(南延年)의 모가지를 날렸다. 권서봉은 이인좌와 협업을 약속하고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로 몰래 들어왔고 장례식을 한다면서 상여에 무기를 넣고 숨어 다녔다. 이인좌는 점령 이후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 박종원을 영장으로 삼고 물자를 모아가기 시작하고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4일 만에 창의사 박민웅에 의해 털리고 망했다.

쌍도에서 안음현[8] 대호족이었던 정희량은 반란군의 영남 방면 군 사령관이 되어 조상 묘를 영주부석사로 옮긴다고 구라를 치고 안음의 지 사저에 물자를 쌓아두고 군머를 모았고 청주로 오라는 이인좌의 말에는 응하지 않았다. 3월 10일쯤에 이웅보(李熊輔)가 이인좌가 양성으로 북진할 때 정희량과 함께 안동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이 새끼가 안음에 처박혀있네? 그래서 빡친 이웅보가 안음으로 직접 가서 안음현 고현창에서 거병했고 안음 현감 오수욱(吳遂郁)과 거창 현감 신정모를 협박해 3월 27일, 두 현을 날로 먹었다. 둘은 각각 현 병영으로 토끼고 신정모는 담 넘어 런했다. 또한 합천 호족 조성좌(曹聖佐)는 정희량에 응하고자 군수 이정필(李廷弼)을 협박했다. 하지만 조성좌 본인은 깜빵에 갔다가 3월 22일 새벽에 이정필이 빤쓰런 한 뒤에 석방되었다. 삼가군의 신만항 역시 현감 이정수를 쫓아내고 합천 반란군에 응했다.

에엑따 시발 경악한 경상 감사 황선(黃璿)은 성주목사 이보혁(李普爀)을 우방장으로 삼고 성주, 지례군, 고령군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계군수 정양빈(鄭暘賓)을 좌방장으로 삼고 의령, 함안, 단성의 군머를 다스리게 하여 진압했다. 선산부사 박필건 또한 반란 진압에 응했다.

3월 28일, 반란군은 거창에서 함양으로 들어가 즌라도로 런하고자 했다. 함양 군수 박사한이 이 반란군을 담그려고 했지만 주민들이 반란군에 붙어서 난항을 겪다가 반란군이 함양을 빠져나가자 부역자들 모가지만 자르게 되었다.

전라도도 반란에 협력하려고 했지만 진작 전라 감사가 눈치 까고 반란 모의했던 태인현감 박필현을 미리 작업 쳐버렸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대규모로 반란군이 거병하지 못했다.

이후[편집]

소론이 반란 진압에 적극적이었지만, 소론 과격파와 남인이 주동해서 일으킨 반란이었으니 소론과 남인은 사이좋게 갈려나갔고 세도정치가 시작될 때까지 헬조선은 노론이 꽉 잡게 되었다. 이렇게 씹창난 남인의 파이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쭈우욱 감소했다. 그리고 안그래도 병신같은 출신성분, 경종독살의혹때문에 정통성에 시달렸던 영조는 즉위초 이 대반란을 겪으면서 정통성에 광적으로 집착하고 마는데...

한편, 주민들까지 합세해 반란을 일으켰던 경상도, 특히 경상우도와 대구는 반역향으로 지정되었고 대구에는 '영남을 평정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평영남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인조반정이후 정치권력의 핵심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던 영남의 정치적입지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완전히 박살났고 조정에서 영남출신은 평안도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입지를 가진 찐따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이인좌의 고향이었던 충청도 청주는 계수관 역모사건이 추가로 터져서 기존 중심지였던 충주, 청주가 모두 반역향이 되었고 이름이 도로 강제로 개명 당한다.

평영남비는 경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사라지게 되었다. 원문은 대학에서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통북공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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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는 이와는 전~~~~~~혀 다른 내용임이 틀림없으니 믿지 마시길 바랍니다.

KBS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 난의 결과를 주작했다. 당시 59회차(2015년 1월 10일 방영) 진행자가 교수 신병주(안동 출신)와 시인 류근(문경 출신)이다.

나주에서 벽서 사건 발생하면서 나주가 한동안 금성현으로 강등되어서 이름이 전광도로 바뀐 것이 이 시기(1728~1737)이기는 한데, 이인좌의 난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왠지 전라도가 좀 넓어졌다? 오늘날 경북 고령, 경남 하동 일부와 함양, 충북 옥천과 영동 일대가 전라도로 칠해졌다.

굳이 방송 내내 이인좌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무신란이라고 얘기한 이유가 무엇일까?

자매품[편집]

각주

  1. 엄마가 무수리 신분이라는 점 때문에 영조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해 정신병에 가까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2. 초계 정씨. 나중에 정희량(鄭希亮)으로 개명한다.
  3. 부원수가 되었다.
  4. 반란에 호응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낫다고 판단되어 대원수로 삼게 된다. 또한 이인좌가 전주 이씨였으니 모가지가 썰린 뒤 족보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 [1]
  5. 경종의 전비였던 단의왕후 심씨의 동생이다.
  6. 사실 반란 진행 중에도 누가 엮여있는지 지속적으로 폭로가 이어졌다.
  7. 낌새가 좋지 않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이 양반이 씹고 가만히 있다가 성 내에서 친구 양덕부가 성문 열어주고 홍임한테 칼빵 맞고 죽었다. 이순신 장군니뮤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8.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