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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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조선 전기의 문신.

황희맹사성의 넘사벽 인지도에 밀리기는 하지만 세종대왕 시절 그분의 정치를 이끈 중요 대신들 가운데 한명이다.

저 위에 있는 틀들은 죄다 부정적이지만 진짜 제대로 된 신하였다. 굳이 저 틀이 붙은 이유는 후술.

생애[편집]

1369년에 태어났고 권근의 제자였다. 고려 공양왕 시절 과거에 급제하고 조선 건국 이후 세종때까지 관료생활 하면서 살았다.


예전과 법률에 조예가 깊었지만 그만큼 정말 지독하리만치 원리원칙주의자였는데 그 먼치킨 왕인 태종세종대왕한테도 바른 소리를 계속 해댈 정도였다. 그래도 두 사람은 허조가 하는 쓴소리에도 그를 잘 써먹었다. 태종도 세종대왕에게 왕위 양보하면서 허조를 가르켜 자신의 주춧돌이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궁궐 내에서도 젊은 대신들에게 이거저거 잔소리를 자주 해대서 허조를 틀딱 꼰대라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별명이 송골매 재상이었을까.


그만큼 본인에게도 엄격해서 부정부패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던 진짜배기 청백리였다. 황희같은 야사 한정 청백리가 아닌 진짜로 탈탈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왔던 사람. 조말생이나 황희는 이 영감님 앞에서는 무릎 꿇고 앉아서 1시간동안 잔소리 들어도 할말 없다. 실제로 1428년 조말생이 뇌물 수수 혐의로 걸렸을때는 앞장서서 조말생을 죽이라고 주장했었다. 당시 법으로도 그정도 뇌물 수수는 처형감이었긴 했지만.


그리고 사대부들처럼 맹목적으로 명나라 후빨하는 사람도 아니었던게 세종 즉위 후에 명나라 영락제가 말 1만필 바치라고 말했을때 그거 바치면 우리나라 기병 1만명이 없어지는 거나 다름 없다면서 반대하였었다. 원리원칙주의자였지만 그렇게까지 맹목적인 인간은 아니었던 듯.


유일하게 흑역사...라고 평가받는 것은 수령 고소 금지법을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한 것. 근데 수령 고소 금지법이 악법이라고 주장하는 놈이 이덕일이니 그냥 무시해도 좋다.


간단하게 말해서 꼰대 기질은 있었지만 자기자신에게도 엄격하였던 제대로 된 틀딱 꼰대(?)였다.


그후 좌의정까지 지내다가 1439년에 죽었다. 죽을때 남긴 말이 꽤 간지나는데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리고 죽을때 허조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고 한다. 진짜 원없이 바른 말 하고 원없이 세종에게 충성을 다 하고 마지막에는 단 한점의 후회없이 간 셈.

기타[편집]

허조의 형님은 허주라는 사람이었는데 완전기억능력의 소유자였고 허조보다 더 엄격했다고 한다. 허조가 커피라면 허주는 T.O.P급.


죽은 타이밍이 진짜 기가 막힌데 훈민정음 반포되기 4년전이다. 만약 이 영감이 그때까지 살아있었으면 지독한 원리원칙주의자답게 훈민정음에 반대하면 반대했지 결코 찬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만리가 훈민정음 가지고 빼애액 한것 때문에 지금 얼마나 욕처먹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저때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