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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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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정말 극혐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태조 무황제의 칙어(勅語) : 서주는… 어… 그거는 황고(皇考)[1] 를 장명(戕命)[2] 한 하나의 폭동이야.
근데 그니까 짐이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로써 위벌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잖아?

서주 대학살[편집]

백성을 너무나도 사랑한 후한의 충신 조조가 서주에서 악덕군주 도겸에게 고통받는 수십만 주민을 강물이 막혀댈때까지 자비롭게 쳐죽인 사건.

조조빠 새끼들은 이 사건마저도 "아버지가 죽은 분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실드치더라. 아니 그럼 문제를 벌인 도겸만 조지라고.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원래 서주에 살았던 제갈량네 가문이 형주와 강남으로 이주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서주에 있던 명사와 인재들이 형주나 동오로 흘러들어가서 나중에 조조의 남방정벌을 파토내는 데 한몫한다.

길게 내다보면 사실상 조조가 천하통일을 못하게 된 것도 이 사건이 원인.

짧게 봐도, 서주에서 이 지랄 하느라 진궁하고 여포가 통수의 진수를 보여주게끔 빌미를 제공해서 이거 진압하느라 한 삽질.

위빠들의 입을 다물게할 마법의 단어다. 촉빠, 오빠들은 숙지하도록

화북인의 대규모 강남이주 스타트가 이거때문에 발생했다. 상기한대로 서주에서 조조새끼가 강물이 막혀대고 쥐새끼조차 종범할정도로 학살쳐해대자 수십만의 서주사람들이 동오, 형주로 내려온거. 광릉국의 확실히 10만이 조조새끼를 피해 내려온게 확인된다.

사람을 어찌나 많이 죽여댔는지 장안에서 삼보의 난을 일으킨 이각 곽사 똥새끼들과 비견되는 대량학살이었고 가는 곳마다 시체가 워낙 많아서 강이 막혀서 흐르지 못하고 마을 전체가 썩는내로 아주 골이 아플 정도로 진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주에 살던 제갈량네 집은 장남인 제갈근만 평소에 친분이 있던 손책한테 가서 일하게 되었고 제갈량이 제갈씨 가문의 당주가 되어 일족을 이끌고 형주로 피난갔다. 이후 제갈근은 매달 받은 녹봉 중 일부를 떼어다 제갈량에게 배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동네 살던 노숙 역시 도망친 이후 주유를 따라 손권의 부하가 된다. 문관뿐이 아니라 당대의 맹장 중 하나인 태사자에 대해서는 애초에 조조가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기 전부터 태사자에게 고구려당귀를 선물로 주고 갖은 아양을 떨었는데 그 태사자가 공융의 휘하로 들어가서도 조조는 태사자 꼬시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조조가 이 서주대학살을 벌이니 태사자는 유요가 망하자 손책의 휘하로 들어가고 조조한테 학살자 좆까를 외치며 그대로 손책 휘하로 말뚝박게 된다.

이와 같이 조조는 서주대학살을 벌인 게 선악을 떠나 엄청난 자충수가 되었는제 제갈근, 제갈량 형제와 노숙, 태사자 등 재야의 재주꾼들을 모조리 얻지 못하게 되었다.

자기가 쳐발릴거 알고도 황제폐하에게 충성을 보이겠다고 서영과 맞붙었던 그 조조와는 왜 그것과는 정반대의 짓거리를 저지른 것일까? 아무리 아버지가 죽었기로서니 꼭 학살을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사람, 호리행이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서주학살과 이후 학살을 비교해서 보면 참 돌I였구나 싶을거다.

아래가 그 시.

關東有義士 (관동유의사) 관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이유는,

興兵討群凶 (흥병토군흉) 간악한 무리(동탁)를 토벌코자 함이었고,

初期會盟津 (초기회맹진) 처음 맹진에 모여 의기투합한 것은,

乃心在咸陽 (내심재함양) 단숨에 함양을 정복하기 위함이었네.

軍合力不齊 (군합력부제) 많은 군/대 모이고 보니 생각도 제각각이요,

躊躇而雁行 (주저이안행) 머뭇거리기만 할 뿐 앞장서 싸우려 하질 않네.

勢利使人爭 (세리사인쟁) 자신들의 이익만 내세워 다투더니,

嗣還自相? (사선자상장) 얼마되지 않아(嗣還) 서로 치고받고 마네.

淮南弟稱號 (회남제칭호) (연합군은 해체되어) 회남의 원술(袁術)은 황제를 참칭(僭稱)하고,

刻璽於北方 (각새어북방) 북방의 원소(袁紹)는 몰래 옥새를 새기는데,

鎧甲生?? (개갑생기슬) 병사의 갑옷엔 이가 득실거리고,

萬姓以死亡 (만생이사망) 백성들은 다 죽어 가는 구나.

白骨露於野 (백골노어야) 온 들판에 백골이 뒹굴고,

千里無?鳴 (천리무계명) 천리에 닭 울음소리 끊겼으니,

生民百遺一 (생민백유일) 살아남은 사람은 백에 하나나 될까...

念之斷人腸 (염지단인장)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누나

백성 죽어나간다고 가슴 찢어진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이 학살자 ㅋㅋ

왜 학살극을 벌였는가[편집]

보통은 아버지가 죽었다! 백성 다 죽어!로 묘사되지만 이것도 확실한 설은 아니다.

과거 중국또한 마을과 마을이 행정망으로 이어져 있었고 적이 쳐들어오면 행정망을 이용해 병사징집을 하여 적을 막아내는것이었다.

조조는 이걸 이용해 각 마을의 행정망을 학살이라는 방법으로 차례차례 끊어 서주성 본진을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만들어버렸다. 이 방식은 나중에 칭기즈칸이 써먹는다

하지만 서주는 조조가 통치해야 할 곳이었고 학살로 민심을 잃은데다 학살에 실망한 진궁, 장막이 여포 불러와 반란까지 일으키니 말 그대로 실패한 계책이었다.

결국 조조는 10만명을 도륙냈는데도 정작 서주를 얻지 못하고 이 사건의 수혜를 귀큰놈과 강동 소패왕이 다 받게 된다.

유비는 이를 막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반쯤 구세주 대우를 받게 되었고 손책은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제갈근 등 서주 유랑민들이 손책의 밑으로 알아서 들어오는 바람에 인재들이 장난 아니게 빵빵해지게 된다.

도겸[편집]

조조가 도겸한테 개쳐발리고 있었는데 마침 도겸의 지원군으로 여포,유비,황건적등 을 불렀고 더욱 조조는 궁지에 몰렸다.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지자 서주의 보급을 씹창내기위해 서주를 피바다로 만든다. 도겸을 궁지에 몰아붙이지만 개쳐발리고.

돌아가던중 장막,진궁과 결탁한 여포에 의해 연주성도 뺏긴채 영혼까지 털린다. 조조는 이기기위해 뭐든하는 인물이다.

충분히 비난 받을 일이나 사사로운 원한이 아니라 불리한 전황을 돌리기위한 발악으로 행한일이니 조조의 인성을 탓하자

베트남전에서도 비슷한 전략을 애용했다. 상당히 비정하고 미친놈 같지만 효율적인 전술이라는 걸 알수있다.

애초에 조조는 물량이 아니라 소수정예의 기병을 휘몰아 단기전을 선호하는 인물인데 도겸이 장기전으로 끌고

조조의 영혼을 탈곡시킨거 보면 이 인간도 평범한 놈은 아니다.


각주

  1. 임금의 죽은 아비
  2. 남의 애비나 임금을 죽인 건 시해가 아니라 장戕이라고 한다.

도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