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연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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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편집]

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대한 조선인민군(북한) 해군 경비정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어 30분 가량 진행된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손상을 입었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 중 침몰하고, 승무원 중 6명이 사망, 19명이 부상하였다. 북한군의 등산곶 684호도 예인되었고,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일어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는 국경 침범의 대응 방식에 대한 반성과 논란이 일었으며, 2004년 교전수칙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개요[편집]

1999년 6월 15일 참수리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던 중 남북간 전투가 발생하여 제1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2일,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임을 주장하고, 인민군측해상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제1연평해전[1]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은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다. 이날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북한의 무력 도발로 남북 간 충돌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를 향한 북한군 등산곶 684호의 지근거리 기습 함포공격으로 시작되어 함포와 기관포를 주고 받는 치열한 격전이 된 전투 후 대한민국의 피해는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하고, 전투종료 후 복귀 도중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하였다. 한편 북한의 피해는 약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로 퇴각하였다.

당시 해군에서는 교전수칙에 따라 경고사격으로 대응하다가 고속정이 침몰됐고, 그 후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사고경위[편집]

전력비교[편집]

남한 : 참수리 고속정 357 제원: 길이 37m, 높이 6.6m, 폭 1.7m, 28명 승선, 156톤급, 최대 속력 38노트 무장: 40mm 포 1문, 30mm 포 1문, 20mm 발칸포 2문

북한 : SO-1급 PCF(등산곶 경비정 684) 제원: 길이 42m, 높이 6.1m, 폭 1.9m, 50명 승선, 215톤급, 최대 속력 28노트 무장: 85mm 단연장포, 14.5mm 2연장포, 37mm 단연장포

교전상황(교전일지)[편집]

교전 당일인 2002년 6월 29일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06:30 어로보호 지원을 위해 남한의 고속정 3편대 6척 출항.
  • 09:54 북한군 경비정 등산곶 388호(155톤) NLL을 넘어 남하 시작. 대한민국 해군 253 고속정 편대 대응기동 실시.
  • 10:01 북한군 고속정 등산곶 684호(215톤) 추가 남하. 대한민국 해군 232 고속정 편대가 대응기동.
  • 10:25 북한군 등산곶 684호가 탑재된 85mm 함포로 450m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실시하던 참수리 357호에 기습
발사, 남한 232 편대 대응 사격. 이 과정에서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파괴되고 윤영하 정장이 사망.
이에 따라 부장 이희완 중위가 정장 임무를 승계받아 지휘함.[2]
  • 10:26 후방에 있던 253·256 고속정 편대 전파사격 개시.
  • 10:30 256 편대 공격 개시.
  • 10:33 253 편대 공격 시작.
  • 10:43 제천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개시.
  • 10:47 진해함(포항급 초계함) 화력 지원 시작.
  • 10:48 제천함, 북한 스틱스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 10:51 화염이 발생한 북한 경비정 다른 경비정에 예인되어 NLL 북쪽으로 퇴각.
  • 10:56 전 전력 사격 중지.
  • 11:25 제천함·진해함, 북한의 실크웜 미사일 전자파 탐지, 대응.
  • 11:45 357호 사상자 확인·구조. 357호는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 포기.
  • 11:59 참수리 357호 침몰.

교전결과[편집]

대한민국 해군 소속 참수리 357호 교전이후 심한 선체 손상으로 예인을 포기, 침몰했으며 침몰 당시에는 탑승한 승무원 30명 중 4명이 사망, 1명이 실종되고 20명이 부상하였으나 이후 치료를 받던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이 국군수도병원에서 전사했으며 실종되었던 한상국 중사(당시 하사)가 침몰 53일 뒤 인양된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에서 발견, 수습되어 결과적으로 총 6명사망 19명 부상하였다. 대한민국 군당국은 북한 경비정이 3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했다.

인양된 참수리 357호는 85mm 대구경 5발, 37mm 중구경 19발, 14.5mm 소구경 234발 등 모두 258발을 맞았으며, 40mm 중구경과 20mm 소구경 680발을 발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수색 및 인양 및 대한민국 전사자 명단[편집]

수색[편집]

교전 중에 한상국 중사가 실종되었으나, 긴장 관계를 고려해 즉각 수색 작업에 나서지 못했다.

인양[편집]

태풍으로 연기된 인양 작업은 다시 한 차례 연기된 후 8월 5일 시작되었으나, 기상 악화로 본격적인 작업이 미루어졌다. 8월 9일 조타실에서 한상국 중사의 유해를 수습하였고, 상 악화와 작업의 난항으로 고속정은 침몰 후 53일만인 8월 21일에야 비로소 인양되었다. 고속정은 연평도 서쪽 25.2㎞ 수심 28m의 해저에 가라앉아 있었다. 건져 올려진 선체에는 조타실 앞부분의 2곳을 포함, 4군데에 축구공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수백 군데에 포탄과 파편 자국이 있었다. 함교 뒤 돛에는 여전히 태극기가 걸려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대한민국 전사자 명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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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국 중사는 실종 후 함체 인양 중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박동혁 병장은 부상으로 후송된 후 치료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4명은 전투 중 전사하였다.

  • 윤영하 소령(정장, 당시 대위, 충무무공훈장 추서)
  • 조천형 중사(병기사, 당시 하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 황도현 중사(병기사, 당시 하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 서후원 중사(내연사, 당시 하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 한상국 상사(조타장, 당시 중사(진), 화랑무공훈장 추서)[3]
  • 박동혁 병장(의무병, 당시 상병, 충무무공훈장 추서)

원인분석[편집]

남한이 피해가 컸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화력[편집]

참수리 고속정에는 20mm M61 벌컨포, 30mm 기관포, 40mm 기관포와 M60 7.62mm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함정은 T34/85의 85mm 전차포와 14.5mm 기관총을 장착하여 화력에서 월등했다. 85mm 전차포는 사거리와 명중률이 떨어지지만 한 발만 맞아도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데 비해서 참수리 고속정에 탑재된 무장들은 적함을 격침시키기 너무 어려웠고, 제2연평해전에서 등산곶 684호는 6척의 참수리 고속정에게 집중사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몰되지 않았다.

방어력[편집]

참수리 357호는 조타실에 85mm 포탄을 직격으로 맞고 지휘부가 타격을 입었다. 부정장의 지휘로 전투는 진행되었으나, 너무 약한 방어력으로 인해서 조타실 등 핵심 시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부의 대응 매뉴얼[편집]

당시 대통령인 김대중이 교전수칙을 적함이 NLL을 침범하면,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순서로 대응하게 만들었다. 특히 적함을 밀어내는 차단기동은 기습 받기 쉬웠고, 참수리 357호정도 차단기동 중 공격당했다.

초계함의 대응[편집]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후 무려 18분이 지나서야 초계함들이 76mm 속사포를 발사하며 전투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 참수리 357호정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전투 발생 초기, 초계함들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참수리 고속정들이 사거리 안에 없었다. 결국 화력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북한 고속정을 침몰시키지 못했다.

기념[편집]

전시: 해군은 인양된 고속정 357호정이 선체 구조물의 비틀림 현상과 장기간 침수로 재사용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평택 2함대사령부 충무동산에 전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명칭 개정: 이 사건은 일반적인 전투의 의미로 서해교전이라 불렸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에 격상하여 '제2연평해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영화 제작 : 2013년 10월에 영화 《NLL-연평해전》이 개봉될 예정이었다. 김학순 감독이 제작 지휘를 하며, 정석원, 장성원 등이 출연한다. 특히 제작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조선일보의 보도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의 지원과 일반 국민의 모금 활동으로 제작비를 충당하여 제작되고 있다. 출연자와 제작진의 재능 기부로 15억 원만 모이면 3D 전쟁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으나, 1, 2차 크라운드 펀딩, 개인 투자자들의 합류로 2억 5000여 만원이 모여 제작비가 부족해졌다. 결국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2013년 4월 22일부터 촬영을 시작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어려운 상에서 제3차 크라운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충당했다.

《연평해전》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 6월 24일 개봉했다.

영화 연평해전[편집]

영화 《연평해전》은 2015년 06월 24일 개봉됨.(일부 사이트에서는 2015년 06월 11일 개봉 했다고 표기됨)

출연진은 다음과 같다.

김무열, 진구, 이현우, 이청아, 이완

(배우성명 - 대역)

  • 김무열 - 윤영하 대위(정장)
  • 진 구 - 한상국 하사
  • 이현우 - 박동혁 병장
  • 이완 - 이희완 중위(부정장)
  • 이청아 - 최윤정 대위[4]

출처표시: [1] 제2 연평해전 위키백과

흥행은 애국심버프로 엄청난 대박을 쳤다.

여담[편집]

[2] 연평해전 뱃지와 스티커를 판댄다. 사러가자.

참고로 당시 시민들의 반응

[https://www.youtube.com/watch?v=

  1. redirect 틀:Trim Video] on YouTube

  1. 문서 연평해전 참조
  2. 그러나 이때 이희완 중위는 이미 한쪽 다리가 절단 되어 장애인이 된 상태였다. 그 몸으로 진두지휘했다.
  3. 7월 1일에 중사 진급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실종되는 바람에 진급이 취소되어 중사로 추서되었다. 그러나 2015년 전사일을 인양 날짜로 변경하여 당시 중사 진급이 완료된 것으로 간주했고, 이에 상사로 다시 추서되었다.
  4. 윤영하 대위와 해군사관학교 동기인 최영순 대위를 여성으로 바꿔서 출연시킨 거임. 실제 최영순 대위는 UDT 지휘관 출신으로 여자와는 거리가 멀게 생긴 외모에 전혀 여자같지 않은 인격의 소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