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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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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의 유명한 책략가. 일본에서는 그 이에야스를 상대로 여러번 승리했다며 지금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이에야스한테 저항한 전적이 있다. 좀 야들야들한 젊은이 시절에는 무토 키헤에라고 불렸으며 가와나카지마 전투(이 때 참가 기록은 확실하지 않음.), 미마세 전투, 미카타가하라 전투 등에 참가하여 활약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크게 격파했던 미카타가하라 전투에 나섰던 적이 있으니 이 둘의 악연은 이 때부터 시작인 셈이다.

신겐 사후 마사유키의 아버지였던 사나다 유키타카도 사망하는데 공교롭게도 나가시노 전투서 사나다의 형제들이 죄다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가문의 승계권이 마사유키에게로 넘어왔다. 이쯤 들어 다케다는 결속력이 눈에 띄게 병신화되어 가고 있었고 마사유키는 코즈케의 누마타를 다스리는 동시에 다케다 가츠요리의 피신처가 될 신푸 성의 건설을 감독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푸에서의 일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오다 노부나가는 군대를 출동시켰다. 가츠요리는 부랴부랴 신푸로 피신을 왔지만 이마저도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마사유키는 가츠요리에게 코즈케의 이와비츠 성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옆 좌석의 오야마다 노부시게는 군나이의 이와도노 성으로 향할 것을 제안했다. 이 상황은 마사유키네 집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노부시게네 집으로 갈 것이냐 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마주한 것인데, 가츠요리는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노부시게네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당첨! 노부나가와 내통하는 배신자 새끼의 집에 잘 오셨습니다. 가츠요리는 멀리 튀지 못하고 오다군에 포위당해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향년 37세. 일설에 따르면, 가츠요리가 노부시게네 집이 아닌 마사유키네 집으로 향했어도 결말은 딱.. 히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사유키가 호조와 내통하는 편지가 여럿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코즈케로 간 가츠요리는 호조에게 붙잡혀 우에스기 가게토라의 넋을 달래는 제물로 바쳐졌을 것이라 추측하는데 그거야 뭐 역사학자들이 흔히 생각해보는 If에 불과할 뿐이다.

다케다 멸망 후 마사유키가 새로 머리를 숙인 곳은 오다였다. 새로 떠오르고 있던 노부나가를 막을 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노부나가 새끼는 하필이면 아케치 미츠히데에 의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고 시나노 일대는 무주공산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마사유키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타키가와 카즈마스, 우지나오, 이에야스 등 여러 세력에 빌붙었다. 어느 한쪽에 붙으면 다른 한쪽을 배반하는 형태였지만 그런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마사유키는 호조와 이에야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제 세력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마사유키의 구상과는 다르게 호조가 이에야스와 화친을 해버리는 병신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러니까 이에야스가 호조랑 싸우는 것을 그만두고 호조에게 사나다의 영지를 넘겨주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마사유키는 크게 빡쳤고 새로운 세력에 빌붙기로 결정했다. 바로 우에스기였다.

이에야스는 지랄하지 말라며 사나다령에 7천의 침공군을 보냈다. 마사유키는 고작 2천 밖에 안 되는 군대로 이에야스에게 맞섰지만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쥐며 외부 세력에게도 위명을 떨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자력으로 적 세력을 막아내기엔 한계가 있었고, 마사유키가 생존을 위해 마지막으로 방문한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근데 이게 또 제대로 적중하여 이에야스와 호조에는 사나다 침공 금지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물론 호조는 끝까지 누마타를 내놓으라며 발악하였지만 사나다로 침공을 못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는데 마사유키는 좆같긴 해도 해당 영토를 어느 정도 내놓기로 합의하며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기어이 호조가 사나다를 공격하고 나서자 히데요시는 이를 빌미로 호조에 대군세, 22만의 오다와라 정벌군을 보냈다. 호조가 멸망한 후 사나다는 꽤나 만족하며 살고 있었으나 이번엔 또 최고 권력자 히데요시가 사망해버리면서 열도는 혼란 속에 빠지게 됐다. 특히 사나다에겐 악연 중의 악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음 권력자로 부상하고 있는게 불운이었다. 물론 마사유키는 이에야스 편에 붙을 수도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에 이시다 미츠나리 편에 참가, 한편으로는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며 동군과의 싸움에 돌입했다. 침공해오는 상대는 도쿠가와 가문의 다음 후계자가 될 도쿠가와 히데타다였다.

마사유키는 끝까지 우에다 성을 사수하며 히데타다의 진군 속도를 늦췄고 이에야스는 진군이 늦어지는 히데타다에게 밍기적거리지 말고 빨리 튀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큰 싸움이 날텐데 많은 병사들이 저 편에 매여있다고 생각하면 이에야스는 리얼로 복장 터졌을듯. 기어이 우에다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도쿠가와군은 공략 목표를 버리고 그냥 지나가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히데타다의 군대는 너무 늦은 나머지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세키가하라서 도쿠가와가 패배할뻔 했던걸 생각하면, 이에야스가 마사유키를 얼마나 증오했을지 말 안 해도 비디오 수준.

이시다 미츠나리가 패하고 서군의 다이묘들은 전부 엄한 처벌을 받았다. 본래 마사유키도 처형 대상이었으나 장남이었던 노부유키의 탄원 덕에 처벌의 정도가 유배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마사유키는 죽기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사면을 꿈꿨지만 그런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도쿠가와와 사나다의 악연은 전국시대를 종결시킨 오사카 성 전투에서 마사유키의 차남 사나다 유키무라가 이에야스에게 돌격을 시도하면서 또 다시 재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