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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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클갤에서는 창렬음악이라고 까인다.

사실 말러는 아주 정교한 음악적 구조로 유명한 작곡가인데도 저 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너무 길고 복잡해서 한두번 들어선 곡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한번 들어선 남는게 없는거 처럼 들려서 그렇다. 창렬과자처럼.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창렬음악

교향곡을 주로 작곡했고 존나 자신감이 쩔었는지 나의 시대는 올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말러는 주요 관현악단 핵심 레퍼토리가되었다.

살아생전엔 작곡가보다 지휘자로 더 유명했고 교향곡 8번 초연 성공이전까진 혹평을 존나들었다. 2번은 머중들한테는 꽤 호평이었지만 평론가에게는 존나 까이고 특히 드뷔시(이놈은 성격이 뭣같기로 유명하긴 함)가 2악장 시작하자마자 자리를 나가서 말러가 상처를 받았다고도 한다.

대표적으로 교향곡 1번 초연 후 평론가 한슬리크는 "우리 가운데 어느 한쪽은 미쳤음이 틀림없지만 그건 내쪽이 아니다." 라고 존나 혹평했다. 그런대 지금은 레너드 번스타인 덕에 졸라게 유명해졌다.

생애[편집]

유년기[편집]

1860년 7월 7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이 다스리고 있던 보헤미아[1] 의 칼리슈트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이글라우(Iglau)[2] 라는 도시 부모 모두 유대인인데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불같은 기질에 술장사하면서 학식 좀 쌓은 기묘한 인물이고 어머니 마리는 온화한 성격에 심장병 등 잔병치레에 시달렸다. 말러 스스로 말동무인 나탈리에게 부모의 이런 기질상의 차이가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원래 구스타프 이전에 이시도르라는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이 죽고 바로 얻은 아이가 구스타프 말러라서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는 공장에서 제품생산하는 것마냥 덮어놓고 폐경 올때까지 낳은게 일반적이었고 그렇게 말러의 부모가 낳은 자식은 구스타프를 포함해 총 14명인데, 그 중 7명이 유아기를 못 넘기고 사망하고 그나마 남은 구스타프의 형제 중에서 10대에 죽은 남동생 에른스트(1862~1875), 시집가서 자식 둘 낳고 20대에 뇌암으로 비명에 간 여동생 레오폴디네(1863~1889),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남동생 오토(1873~1895)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천수를 누린 이는 구스타프 포함해 4명에 불과하다. 어려서부터 죽은 형제들의 관짝이 오고 가고 하는 걸 하도 많이 지켜봤을 터. 이 모습도 말러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음악적인 재능은 여느 음악신동들 처럼 빠른 편이었다. 어려서 외갓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민요와 군가를 암기했을 정도였다.(민요와 군가, 그리고 유대교 노래도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본격적으로 레슨도 받고 학업도 이어갔다. 학교에서의 성적은 수포자의 그것과 같았다. 마을에서 공연도 하고 그랬다.

11살 때인가 잠깐 프라하에서 하숙하다가 적응을 못하고 내려왔고 바로 밑 남동생 에른스트가 병에 시달리다 죽은 걸 목격해야 했다.

15살 때에 으로 가서 빈 음악원에 들어가게 된다. 잠깐 빈 대학에서 청강생 자격으로 강의를 들은 바 있다. 빈에서 사귄 친구가 가곡 작곡가 휴고 볼프(1860~1903) 교향곡 1곡 남기고 정신병으로 인생 쫑난 한스 로트(1858~1884) 등이 있다. 그의 학창 시절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이 인기라서 그의 팬이 되었다.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안톤 브루크너의 팬이기도 했고 특히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 초연 때 청중들이 야유하다 떠나고 거의 텅 빈 공연장에서 박수를 친 몇 안되는 사람이었고 즉시 친구와 함께 피아노 편곡판을 만들기도 했다.

빈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피아노 4중주 a단조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폐기해서 영영 없어진 줄 알았는데 1악장이 남아서 지금도 연주되고 있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에 나온 음악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

  1. redirect 틀:Trim Video] on YouTube

ㄴ이거

졸업하고 나서 갑자기 막막해졌다. 칸타타<탄식의 노래>를 작곡해 베토벤 상 받고 상금 거하게 타서 평생 작곡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왠걸 심사위원인 브람스와 평론가 한슬리크는 반(反)바그너 파라서 광탈. 결국 켄 러셀 감독의 말러 영화[3] 의 말러의 대사대로

I conduct to live, I live to compose.

한 마디로 지휘자의 삶을 살지 않으면 굶어 뒈짖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얄궂게도 말러는 지휘와 편곡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어지간한 공연은 거의 다 성공했다. 또한, 현재의 댄스하는 거 같은 지휘법은 말러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고, 그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초창기 지휘자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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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기차나..

1880년 휴양지 바트 할에서 소규모 관현악단을 이끌고 알바를 했다.

1881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라이바흐(Laibach)[4] 에서 지휘자가 되었다.

1882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올뮈츠(Olmütz)[5] 로 옮겨 지휘 일을 계속 했다.

1884년 독일의 카셀(Kassel)에서 오페라 극장의 부지휘자 역을 했는데 정지휘자와 극장 관계자 사이에 트러블을 일으켰다. 이 무렵에 요한나 리히터라는 성악가와 밀당하다 결국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야붕이들의 야카오톡이 떠오른다. 이 무렵에 가곡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쓴다. 가사는 지가 직접 썼다.

1885년 프라하로 가서 땜빵 지휘자가 되었다. 여기서도 베티 프랑크라는 성악가와 또 밀당하다 차임.

1886년 라이프치히로 가서 지휘자가 됨. 그런데 여기서도 트러블이 생겼다. 이 시절에 특기할만한 일로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의 미완성 오페라인 세 명의 핀토를 완성했다는 점과 베버의 손자며느리와 썸씽이 있었다....어?

부다페스트 시절[편집]

1888년 이리저리 전전하기만 했던 말러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둘째가는 도시인 부다페스트의 오페라 극장 지휘자 자리를 얻었다. 장기 계약에 만족할 만한 금액으로 헝가리에 입성한 말러는 존나 의욕적으로 일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성공적으로 지휘하는 등 명성을 높이 쌓아갔다.

그러나 이듬해는 그에게 존나 비극적인 해였다. 아버지 베른하르트가 작고하고 시집가서 아이 둘 낳은 여동생 레오폴디네가 평소 두통으로 고생하다가 갑자기 뇌암으로 숨지고 이어 어머니까지 잃어 남은 동생들을 자기가 다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교향곡 1번 거인(Titan)의 부다페스트 초연은 아주 시원하게 망해버렸다. 처음에는 박수라도 받았는데 3악장에 동요[6] 를 비튼게 흘러 나오니까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이어 4악장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말러의 생전에 그의 작품들에 대한 비평가의 평은 지휘나 해라. 괜히 작곡해서 피곤하게 하지 말고. 이랬다. 이 1번 교향곡은 여러 차례 개정에 개정을 거듭했음에도 공연할 때마다 청중의 야유와 비평가의 혹평이 뒤따랐다. 존나 저주받은 작품인데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말러 교향곡 입문자들이 쳐빠는 작품이 되었으니 참... 사실 초연한 1번 교향곡과 지금 악보가 남아있는 1번 교향곡은 상당히 다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저 혹평을 듣고 덕지덕지 붙여놨던 악기 사용을 잘 정리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뭐 나는 말러 추천곡으로 1번을 권하진 않는데, 1번은 곡의 구성이나 악기 편성이 말러의 전형적인 그것과는 차이가 꽤 크기 때문이다. 즉, 말러 작품이지만 작품의 색은 꽤나 옅다. 그래도 꽤나 수작임은 틀림 없는데, 그 베토벤도 1번 교향곡은 완성도 면에서 까이는데 이건 그렇지는 않다. 왜냐면 위에 적었듯이 꽤 큰 수정을 거친 걸로 추정이 되기 때문이다.


암튼 이런 망신도 겪었어도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계속해서 쌓아가다가 1891년 극장 감독이 반유대적인 수꼴 백작 나으리로 변경되어서 마찰 끝에 함부르크로 갔다. 어찌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지 고별 공연에도 커튼콜이 생략되기까지 했다고.

함부르크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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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해라 일! 노력해라 노오오력!
열심히 일해서 주인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 새끼들아

아무래도 극장주가 같은 유대인이라서 나을 줄 알았는데 씨발 연봉이 부다페스트 시절보다 짜고 업무 강도는 존나 쩔었다고 한다. 세이콘에 굴려진 불펜투수마냥 굴려진 셈이다.

그래도 이 시절에 선배 음악가들과의 교류가 많았다. 부다페스트 시절에 브람스와도 교분이 있었고 함부르크에 와선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7] 와 차이코프스키의 칭찬을 받았고 그 외에 영국으로 가서 지휘도 하고 그랬다. 또한 후배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브루노 발터는 말러 사후 말러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전인 1960년대까지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와 함께 말러 음악의 전도사가 되었다.

이무렵에 작곡된 교향곡이 2번[8] 과 3번[9],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등을 작곡했다. 작곡시기는 대개 오페라 시즌이 끝난 여름 휴가기간에 이룬 것이다.

이 무렵에 한 차례 이혼하고 말러에게 찾아온 나탈리 바우어-레흐너(Natalie Bauer-Lechner, 1858~1921)를 걍 말동무 겸 비서 삼아 지냈다. 두살 연상의 나탈리는 구스타프 말러의 여친은 커녕 썸녀조차 못되었다. 나중에 말러와의 결혼에 골인한 알마는 늙은 년이라고 깠다.

마침내 빈으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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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혹사와 극장주와의 트러블이 점점 심해지면서 말러는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게 된다. 마침 빈 궁정가극장의 감독 자리가 비었고 얼마 후에는 지휘자 자리도 비어서 그 자리 따려고 노력했다. 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몇몇 음악인들의 추천을 받기는 했는데 아직도 유대교 신자라는게 걸림돌이었다. 그 당시엔 카톨릭 신자만이 공직이라 할 수 있는 빈 궁정가극장 감독이 될 수 있었기에 부득이하게 개종을 해야 했다. 진지하게 믿는 건 아니지만.

빈에 입성한 말러는 대대적인 개혁을 부르짖었다. 오페라 극장 내부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 잡고 오케스트라를 최고 수준으로 조련하고 성악가들을 자주 갈아치우면서 최상의 상태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대에 나온 오페라는 거의 다뤘다고 한다. 어느새 말러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휘자"로써만. 여전히 자신의 교향곡에 대한 비판은 늘상 따라붙었다.

빈 필하모닉도 맡았는데 평은 별로였다고 한다. 뭣하러 베토벤 교향곡에 목관악기를 덧붙이느냐고 비난을 받는 등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나이 마흔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에 쓴 교향곡이 4번 교향곡이다. 1번 교향곡 정도로 1시간 안팎의 길이를 지닌 교향곡인데 이것도 존나 욕먹었다. 저번에는 너무 악기 편성이 과하다고 욕해서 트롬본 같은 자극적인 악기를 빼고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안 웅장하다고 까였다.

젊어서 쓴 칸타타 <탄식의 노래>를 개정해서 초연했는데 오지게 욕을 처먹고 얼마 안가 치질 걸려서 하마터면 고인이 될 뻔했다. 이때는 항생제가 없었다는걸 기억하자. 감염 잘못되면 온몸이 썩어가면서 죽는거다.

결혼[편집]

전성기[편집]

교향곡 8번, 머지의 노래, 교향곡 9번을 작곡하고 8번을 초연했다. 이는 머중에게 큰 호평을 받았지만, 말러의 아내는 다른 건축가랑 바람을 피고 딸은 죽고 난리도 아니었다.


빈 시절의 종말[편집]

뉴욕 시절[편집]

사망[편집]

1911년 5월 18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심장 판막에 염증이 생기고, 이게 패혈증으로 발병한 것이다. 지휘와 작곡을 동시에 한다고 몸을 막 굴린 잘못이 크다. 꽤 초기부터 병을 확인했기 때문에 혈청치료 등 여러 치료법을 시도했지만 끝내 사망하였다. 지금이라면 항생제 써서 금방 치료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당시의 열악한 의료기술의 한계로 종종 사망 진단을 받은 사람이 관 안에서 깨어서 고통속에 죽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심장을 매스로 찌르고 장례를 치렀다.

사망 이후~현재[편집]

사망 이후 초연하지 못 했던 대지의 노래와 9번 교향곡이 초연되었다. 9번은 그의 제자 부르노 발터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끝나고 지휘봉을 못 내려놓고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죽고 고작 반세기 정도가 지난 뒤, 레너드 번스타인에 의해 말러의 교향곡들이 본격적으로 재발굴이 되고, 슬슬 장단조에서 탈피한 머중음악들(해비메탈이나 뭐 이런것들)과 잘 맞아떨어져서 큰 붐이 되었다. 특히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교향곡은 1악장의 거의 완전한 완결도와 조성 기반의 교향악의 부패, 3악장의 정교한 푸가, 4악장의 웅변적인 마침 등으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미완성 10번 교향곡은 1악장만 많은 음악학자들이 약간의 편곡을 가해서 인정하고 있지만, 많은 말러팬들이 나머지 악장도 쥐똥만한 악보를 붙들고 보완했고, 그 작업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1악장의 비조성적인 비올라 도입부와 5악장의 아름다운 플루트 솔로가 꽤나 유명하다. 하지만 이 10번 교향곡은 말러가 죽음을 예견하고 미완성된 악보를 태워버리라고 했지만, 쌍년인지 영웅년인지 알마가 그걸 붙들고 말러 팬 중 하나였던 쇼스타코비치나 말러의 애재자였던 부르노 발터나 다른 음악가 응디에 매달려서 형님 형님 하면서 완성을 요청했지만 말러 성격을 알던 말러 친구들은 전부 거절했고 말러랑 별 상관 없을거 같은 사람들이 보완하고 완성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말러의 딸 중 하나는 80년대까지 조각가로 일하다 결국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영향[편집]

후기 낭만주의의 정점으로 꼽히는 말러는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새로운 사용법을 개척해 현대음악과 현대 영화음악에 큰 빛을 지게 만들었다. 쏘--련의 작곡가이자 최후의 퍼스트 클래스 교향곡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도 말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쇤베르크는 말러의 팬이었다.


말러의 작품[편집]

작품을 몇개 안 써 다 유명하다. 대신 하나하나가 규모가 존나 크다. 교향곡은 시간으로만 따져도 모차르트 3~4배, 베토벤 1.5~2배 정도 분량이다. 거대한 편성 생각하면 양은 더 많다.

말러 피아노 사중주 A단조. 셔터 아일렌드에서 나온 음악이다.

교향곡 1번 "거인": 말러 입문곡으로 많이 추천된다. 말러스러운 색체는 옅다. 4악장 빼고. 길이가 50분 정도로 말러꺼 치곤 짧다.

교향곡 2번 "부활": 마지막 합창 피날레가 핵심이다. 공연장 가면 종종 눈물 뚝뚝 흘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감동적인 곡이다. 교회 종을 중간에 사용한다. 길버트 카플란이라는 사업가의 연주가 유명하다.BBC 선정 교향곡 5위

교향곡 3번: 100분이 좀 넘을 정도로 아주 긴 곡이다. 창렬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BBC 선정 교향곡 10위

교향곡 4번 "천상의 삶": 종소리로 시작하는 인트로가 인상적이다. 음악이 꽤나 잔잔한 편이다. 하이든 + 말러의 조합.

교향곡 5번: 4악장 Adagietto가 유명하다. 아주 아름다운 곡이고 5악장 구성이다. BL물 고전작인 베니스에서의 죽음 영화판에 이 아다지에토가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5악장은 말러 곡중에서 가장 밝고 화려하며 덜 무거우니 들어보도록

교향곡 6번 "비극적": 말러것 치고 형식성이 살아있지만 동시에 가장 말러스러운 곡이기도 한 신묘한 곡이다. 2, 3악장 순서 논쟁이 있는데 2악장 안단테랑 3악장 스께르초 파가 현재 지배적이다. 4악장 론도피날레가 가장 특이한데, 대편성 싫어하는 사람은 발짝날 정도로 밀도있고 복잡한 오케스트레이션 진행 때문에 연주하기도 ㅈ같고 제대로 된 공연 보기도 참 어려운 곡이다. 정신 사납고 비극적인 악장이고, 이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람만한 나무망치로 2번이나 3번(이것도 논쟁이 있다. )내려친다. 말러는 이 소리를 찾기 위해 개지랄을 했고(나무가 최후에 일격에 쓰러지듯 금속성이 아닌 소리라고 적어놓았다. ) 보통은 존나 큰 나무 오함마를 쓴다. 이를 서양권에서 말러 해머라고 한다.[10] 트럼펫 6대, 호른 8대의 아주 큰 편성의 교향곡이다.

교향곡 7번 "밤의 노래": 5악장 아치형 구성이고, 말러의 음악 중 9번과 함께 현대음악의 촉발제가 되지 않았나 하는 의견이 있는 교향곡이다. 불협화음이 꽤 많아 듣기 힘들고 연주도 자주 안 한다. 현대음악 거장 중 하나인 쇤베르크가 이거 듣고 뿅가서 말러한테 형님형님 하면서 편지도 쓰고 그랬다. 근데 평은 워낙 안 좋아서 머중도 싫어하고 평론가도 싫어하고 제자 중 하나인 브루노 발터도 별로 안 좋아했다.

교향곡 8번 "천인": 2부 구성으로 되어 있는 합창교향곡이고, 말러가 생전에 들은 자신의 마지막 곡이다. 성부가 매우 많고 복잡하고 편성도 관현악 300, 합창단 700정도 해서 천명 정도로 해서 초연했고 평은 ㄱㅆㅅㅌㅊ였고 말러 자신도 역작이라고 존나 좋아했다. 다만 작품성 면에서는 좀 떨어진다고 평가된다. 그렇다 해도 말러의 다른 작품에 비교해서나 그렇지 ㅆㅅㅌㅊ의 완성도와 구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000명 규모로 롯데콘서트홀에서 했는데, 잘하냐 못하냐를 떠나서 별로 크지도 않은 홀에 1000명을 우겨넣어서 소리가 과포화 되어서 자다가 악몽꿔서 일어났다는 평도 있는 망한 공연이었다고 평가된다. 사실 500명 정도로 무리 없이 공연이 가능하지만, 초연의 마케팅 때문에 천명 맞춰서 공연하고 "천인"이라는 제목도 마케팅 담장자가 지었는데 이걸 말러는 싫어했다. 자기 작품보다 규모가 더 부가된다고.... 250명 정도면 연주에 전혀 지장 없다.

교향곡 9번 "이별과 죽음": BBC에서 100명의 지휘자 상대로 조사한 위대한 교향곡 순위에서 말러것 중 1위를 차지했고(1위: 베토벤 3번 "영웅", 2위 베토벤 9번 "합창", 3위 모차르트 41번 "주피터", 4위 말러 9번), 음악사에 끼친 영향도 컸다. 1악장의 중국 4음계로 시작되는 하프 공명음과 두 번 긋는 비올라로 시작해서 음 단편을 툭툭 던지며 진행하는 말도 안되는 진행부터 해서 끝날때도 희미하게 끝나지만 완결성을 가진 특이한 구성, 2악장의 3개의 주제가 발전하다 서로를 잡아먹고 해체되는 파괴적인 구성, 뜬금없는 3악장의 아주 정교한 푸가, 4악장의 웅변적으로 시작했지만 죽어가듯이 끝나는 종악장 등 괴작이지만 악장간 연관관계가 은근히 있고, 비조성적 진행도 존재해서 현대 음악의 발화점이 되었다고 평하는 이도 있다. 참고로 1악장 중간부에 “오! 젊음이여! 사라졌구나! 오 사랑이여! 가버렸구나!(O Jugendzeit! Entschwundene! O Liebe! Verwehte!”라는 글귀가 있다. 2018년 올해 유난히 굵직한 공연이 많았고 KBS 연주는 꽤 ㅅㅌㅊ였다. 괴작이라고 해서 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4악장이 아주 아름다우니 들어볼 것을 권한다. 말러가 사망한 이후 초연되었다.

미완성 교향곡 10번: 5악장 구성이지만, 제대로 말러가 작곡했다고 볼 만한 건 1악장 뿐이다. 다른 악장들은 파편적으로 작곡된 걸 살려서 만든 보완판들이 많다. 데릭 쿡 판이 인정받고 있지만, 특히 4악장은 쿡판도 논란거리.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ㄴ 뤼케르트 가곡집 꼭 들어라 개명작 ㅇㅈ?

"대지의 노래": 가곡과 교향곡의 중간적인 곡이다. 말러가 9번 교향곡의 저주라고 해서 음악가들이 9번 교향곡 쓰고 뒤지는 징크스를 피하기 위해 꼼수를 쓴 사실상 9번째 교향곡인데, 결국 혼모노 9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죽었다. 어찌보면 소나타 형식을 띤 연가곡이아 할 수 있겠다.

"블루미네": 원래 1번 교향곡의 일부이나, 따로 떼어내었다. 악보가 소실된 줄 알았으나 재발견되어 다시 연주되고 있다. 그 당시 말러는 이 곡을 교향시 취급했기에, 교향시 성격이 강하다.

학생교향곡 폐기되었는지 악보는 없다. 말러가 음악학교 시절에 썼던 곡이다.

  1. 체코의 북서부 지역이다.
  2. 현 체코의 이흘라바(Jihlava)
  3. 1970년대 초에 나온 영화인데 고증은 기대하지 말자
  4. 지금의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Ljubljana)
  5. 지금의 체코의 도시 올로모우츠(Olomouc)
  6. Are you sleeping? Are you sleeping? Brother John, Brother John, Morning bells are ringing! Morning bells are ringing! Ding, dang, dong. Ding, dang, dong. 니들이 아는 그거
  7. 바그너에게 마누라 뺏긴 NTR 피해자이기도 하다.
  8. 흔히 부활교황곡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9. 100분에 육박하는 존나 쳐 긴 교향곡이다. 아마 이거보다 더 긴 교향곡은 없을걸? 좀 창렬하긴 하다. 인정한다.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