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흰색 배경은 직접 선거. 연회색 배경은 국회의원 선출 간접 선거, 회색 배경은 선거인단 선출 간접 선거, 검은색 배경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이다.
3.15는 부정선거로 선거 결과가 인정되지 않아 취소선 처리하였다.
제1공화국 1대
1948년
2대
1952년
3대
1956년
3.15
1960년
제2공화국 4대
1960년
제3공화국 5대
1963년
6대
1967년
7대
1971년
제4공화국 8대
1972년
9대
1978년
10대
1979년
11대
1980년
제5공화국 12대
1981년
제6공화국 13대
1987년
14대
1992년
15대
1997년
16대
2002년
17대
2007년
18대
2012년
19대
2017년
20대
2022년
21대
2027년

개요[편집]

사사오입 개헌 버프로 이승만이 세 번째로 입후보한 창렬 선거. 6.25 전쟁의 총성이 멈춘 뒤 치러진 첫 대선이다. 전쟁 끝난 지 3년밖에 안 되어서 반공 정서가 강했던 덕분에 이승만이 무난히 당선되는 결과로 끝났다.

상세[편집]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vs신익희vs조봉암의 삼국지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야당의 경쟁 후보인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선거 유세 기간에 뇌일혈로 사망했다.

이승만 정부에 반감을 가진 유권자들은 사망해서 무효표가 될 신익희에게 투표했고 기어코 신익희는 20%의 득표율을 자랑했다. 아마 사상 최대의 무효표 비중이 아닐지.

부정이 가득했지만 의외로 조봉암이 30%의 득표를 하며 선전했다. 만약 그 20%가 전부 조봉암에게 갔다면 득표율은 50%가 된다. ㅎㄷㄷ 다만 민주당의 성향과 조봉암의 성향이 달랐기 때문에 민주당이 조봉암을 지원해준다고 해도 그 표가 다 조봉암에게 갔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무효표를 제외해서 득표율을 계산하면 조봉암 득표율은 30%라고 하는 게 옳다. 당시에는 무효 표도 같이 고려해서 11%라고 한 것이다.

이후 조봉암은 자신감을 얻고 1958년에 진보당을 창당했는데 당의 강령에 '평화통일' 문구가 들어갔다고 사형을 당했다. 당시 조선로동당 강령에도 '평화통일'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북한 사주 받은 간첩이라고 누명 쓰고 사형 당했다. 당시 1심을 맡은 유병진 판사는 판결이 물렁하기로 유명했고, 조봉암에게 5년 징역이 선고되자 이승만은 항소를 했다. 이승만은 항소 후 유병진을 경질한 다음 재판에 들어갔고 2심에서 사형 판결 받았다. 대법원 3심 판결 때 조봉암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유권자 960만 명 중 무려 906만 명이 투표했는데 이것은 헌정사상 최고 투표율(94.4%)을 기록했다. 대한민국 망할 때까지 깨지지 않을 기록일 것이다.

부통령 선거[편집]

이때 부통령으로 장면이 당선된다. 이 결과에 충격 받은 자유당은 차기 부통령 선거에서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