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빅토르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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Цой жив!!!

구소련의 음악가이자 록밴드 키노의 보컬 겸 리더였다.

인물 개요[편집]

1962년 06월 21일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종종 오해하는 부분인데, 그의 고향은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가 아니다. 그 곳은 빅토르의 아버지 출생지다. 제발.

고려인 아버지와 러시아인(우크라이나 출생)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다만 이걸 가지고 한국계나 고려인 어쩌고 운운하면 곤란한 게, 빅토르 본인은 한국보다는 동양 전체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후기 노래는 상당히 은유적이고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민족주의적 가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오히려 이런 접근은 빅토르 초이의 음악세계를 비하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예술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에서 '제6병동' 밴드를 결성했고, 이 때문에 "사회주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 반체제 음악을 연주한 죄"로 퇴학당했다가 이후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실제로 그는 손재주에 능했으며, 나무로 조각상을 종종 깎았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본인이 학교 다닐 때부터 좋아했던 록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전 서술에서는 '개슬람' 운운하며 서방 음악인 록음악을 탄압했다고 기술했지만, 그당시 소련은 락을 그닥 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북한 수준의 탄압까지 한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소련 정부에서는 공식으로 '록 파노라마'라는 대회까지 공식적으로 개최했고, 81년에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루빈슈타인 거리에 '레닌그라드 락 클럽'을 세워주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이 '락 클럽'이라는 게, 마치 극장과 같은 구조로 점잔빼고 앉아 정자세로 경청해야 했으며, '락 공연'하면 생각나는 팬들의 플래카드 응원조차 금지된 - 하여간 흠좀무한 곳이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레토(2018)'에 잘 드러난다.

제6병동의 해산 이후 빅토르는 알렉세이 리빈 등과 함께 '가린과 쌍곡선' 밴드를 결성했다가, 이후 리빈, 올렉 발린스키와 밴드 '키노'를 결성한다. 이 '키노'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여럿인데, 빅토르가 영화(키노가 러시아어로 영화를 의미)를 좋아해서 지었다는 설도 있고, 리빈 혹은 기타 멤버가 내놓았다는 설도 있다.

1982년 그는 첫 앨범 '45'를 녹음하는데, 이때 드러머였던 발린스키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드럼 머신으로 녹음을 해야 했으며, 이때 '아크바리움'의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이 사람도 러시아 락 분야에서는 상당히 유명하며, 빅토르 사후 우울증에 시달렸을 정도로 그와 친했다)가 도움을 상당히 많이 주었다. 머신을 쓴 것 때문인지, '45' 앨범의 드럼 반주는 타 앨범과 비교하면 상당히 독특하게 들린다. 이후 1983년 빅토르는 당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징집 영장을 피해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당시 동양인스러운 얼굴이면 아프간으로 끌려가기 쉽다는 진위 불명의 루머에 의한 것으로, 이 때문에 빅토르는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청소부 등 여러 직업을 전진하다 보일러공으로 정착한다. 이후 1983년 1월 '마지막 영웅'이라는 제목의 앨범을 녹음하기 시작했으나 중간에 초이가 흥미를 잃고 그만두었기에 현재 이 앨범은 처음 네 곡+미완성된 한 곡만 존재한다. 다만 트랙리스트는 존재한다. 1983년 초이와 리빈의 갈등 끝에 리빈이 탈퇴하는데, 이것 또한 이 앨범의 중단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1989년 리믹스 앨범인 '마지막 영웅'과는 이름만 같다. 83년 마지막 영웅은 어쿠스틱 선율이 주고, 89년 마지막 영웅은 한 곡을 제외하면 기존 곡들의 리믹스에 일렉 선율이 주다.

왜 잘나가는 락스타가 보일러공으로 일했냐고? 당시 소련은 저작권 따위 줘 버린 곳이었으며, 락스타라 해도 그게 돈을 벌어다 주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982년 마리안나라는 여자와 동거하기 시작했으니 돈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참고로 다른 여자와 사귀면서 마리안나와는 1987년 결별하지만, 둘 사이에는 알렉산드르(샤사) 초이라는 아들이 있다. 빅토르는 아들을 끔찍히 아꼈다고 한다)

비록 '45'의 경우 그닥 인기있는 앨범은 아니었지만, 이후 '캄차카(캄차트카)의 지배인'(1984), '이건 사랑이 아냐'(1985), '밤'(1986) 등의 앨범을 거치며 서서히 인기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밤' 앨범의 경우 1986년 덜 완성된 상태로 비공식판이 프로듀서에 의해 유출되었는데, 1988년 당시 소련의 유일한 국영 음반사였던 멜로디야에서 저작권료 한 푼 안 주고 무단으로 찍어 20만장 넘게 파는 흠좀무한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불법 복제도 문제지만 이 앨범은 초이가 만들다 흥미를 잃고 때려치운 앨범이라 초이는 이를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전에도 '데모 앨범'인(다시 말해서 기타 연습에 불과한) '46'이 공식 앨범인마냥 찍혀 나온 일이 있다.

당시 소련의 음반사는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밖에 없었기에 이들의 앨범 대부분은 카세트 테이프로 찍혀 돌았다. 이런 불법 복제 테이프를 사미즈다트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원래 타자기로 일일이 쳐서 돌았던 '반체제적' 금서들을 말한다. 쉽게 말해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 일일이 수작업으로 타이핑해 암암리에 돌았던 라이트노벨 텍본을 연상하면 된다.

키노는 1988년 앨범 '혈액형'을 내놓으며 전국구적 히트를 치게 된다. 가장 유명한 곡이자 앨범의 타이틀이었던 '혈액형'은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소련의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는 일이 속출하는 걸 비난하는 반전 가요인데 이게 제대로 히트를 쳤다.

이후 1989년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또한 대박을 쳤는데, 1990년 5월 모스크바 올림픽 경기장에서 공연을 열자 6만 2천여 명의 관중이 모여들고, 무려 성화까지 점화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빅토르는 영화에도 여럿 출연했는데, 그 중 유명한 게 '이글라(마약 바늘을 의미, 1988)'이며, 이 외에 '휴가의 끝'이나 '아사(이건 엔딩 크레딧에 특별 출연, 다만 빅토르는 별로 좋아하지 않은 영화라고)' 등이 있다. 여담으로 지인들 증언에 의하면 초이는 평소 가라테 같은 운동을 좋아했으며(덤으로 브루스 리도 좋아함), 락스타라는 이미지와 달리 과묵하고 농담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 8월 15일, 그는 라트비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한다. 당시 앨범 녹음을 위해 라트비아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마친 뒤 좋아하던 낚시 여행을 떠났는데, 빨간색 이카루스 250 버스가 그의 모스코비치 차량을 들이받은 것. (이후 러시아 웹에서 이 빨간 이카루스 250은 컬트적 인기를 끌게 된다. 근데 이거 고인드립 아닌가)

그러자 러시아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는데, 그의 뒤를 따라 5명의 팬이 투신자살하는 사고가 터졌고, 수많은 팬들이 거의 3년 동안 무보수로 그의 묘지기 신세를 자처했다고 한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보고슬로프스코예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으며, 지금도 이 곳은 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마지막 영웅'인 빅토르 초이와 키노는 80년대 소련 음악계를 휩쓸었으며 지금도 많은 러시아 락덕들은 갓토르 최 후빨에 여념이 없다.

러시아 아재 중 갓토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된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 등 러시아 및 구 소련의 여러 나라에는 초이를 기념하는 일명 '초이 벽'이 있는데, 이 곳에 들릴 경우 아래에 위치한 재떨이에 반쯤 부러뜨린 불 붙은 담배를 한 갑 두고 오는 게 암묵적 룰이다. 지인들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말보로 담배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의 노래를 가지고 '반체제적' 운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주장은 좀 신중하게 파고 들어가야 한다. 빅토르 본인이나 그의 지인들 모두가 그는 정치적 가사를 쓰지 않았다고 말한데다 당시 그가 속했던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 음악계는 자신들의 억압하는 체재에 대놓고 비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냉소적으로 대처하지.

못 믿겠으면 45나 46(데모 앨범인데 팬들은 반쯤 정규 앨범으로 침) 같은 초기 음악들을 들어보면 된다. 가사가 아주 그냥 돈 없고 활발하고 소탈한 20대 동네 백수 마인드다. 물론 그때부터 음울한 가사는 싹을 보였지만.

음모론[편집]

정부 까다가 칼빵...은 아니고 사고를 위장한 살인을 당했다는 썰이 있다.

어떻게 된 거냐면 빅토르 최가 앨범 녹음을 한 뒤 차타고 집으로 가던 중 트럭과 추돌사고가 나서 죽었다.

이때 소련 정부는 갓토르가 바쁜 스케쥴을 수행하다보니 피곤해서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목격자가 갓토르는 정상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트럭이 차를 쳤다고 증언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당시에 "갓토르 최의 진실을 밝혀야합니다! 조속한 진상규명! 부검촉구!"라면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소련 정부는 이례적으로 윾가족 동의 없이 시신을 화장해버렸다.

그리고 미래의 소련인 현재 러시아도 국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최초로 140%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전설을 보인다.

ㄴ 근데 서양 웹에서는 이런 KGB 연루설을 사실상 뻥으로 보고 있음. 그 근거 중 하나가 똑같이 레닌그라드에서 활동하고 있고 지금도 활동하는 '텔레비조르' 밴드 때문인데, 미하일 보르지킨을 주축으로 한 이 밴드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부 까기에 여념이 없는 밴드임. 심지어 지금은 그 푸틴마저 싸잡아 까고 있음. 근데 이 사람 아직도 잘 활동하고 밴드도 건재함. 참고로 보르지킨은 이 때문에 같은 레닌그라드 쪽에서도 평가가 좋지 않았음.

대표곡[편집]

발매년도랑 수록앨범은 알아서 찾아라

혈액형 (Группа крови)

ㄴ이거 진짜 명곡이니까 꼭 들어라

앞으로 나아갈 곳 (Место для шага вперёд)

ㄴ이것도

밤 (Ночь)

캄차트카 (Камчатка)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별들은 이곳에 남으리 (Звёзды останутся здесь)

악몽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 (비핵화지대로) (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 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

담배 한갑 (Пачка сигарет)

외곽전철 (Электричка)

밤을 보았네 (Видели ночь)

질문 (Вопрос)

너와 나 (Нам с тобой)

마지막 영웅 (Последний герой)

변화를 원한다 (Хочу перемен)

전쟁 (Война)

뻐꾸기 (Кукушка)

여름이 끝난다 (Кончится Лето)

단어없는 노래 (Песня Без Сло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