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이시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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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세조 13년(1467년) 길주 출신의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조선의 군사 반란. 말이 좋아 반란이지, 사실상 함길도 vs 조선 7도로 이뤄진 내전에 가까웠다.

배경[편집]

본래 조선 조정은 여진족을 포함한 북방 이민족들이 도내에 많이 살고, 국경은 그들과 접해있다는 함길도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토관제'라고 해서, 인망이 있는 호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통치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토관제를 실시하면서도 여진족의 세력을 약화하고 조정의 행정력을 키우기 위해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남방의 주민들을 계속 이주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쿠데타수양대군이 집권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게 되었다. 이 새끼는 좆병신 같은 정통성 때문인지 통제를 강화하는데 이 통제 강화의 일환으로 실시된 호패제와 함길도에 직접 중앙 관료를 파견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직접적인 화근이 되었다. 이 정책들은 함길도 호족[1] 과 도민들이 조선 조정에 가지는 반감을 키웠다. 이시애는 이런 불만을 가진 호족, 도민의 세력을 집약, 백수가 된 동안 자신의 반란군 집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삼도에서 출병한 군병이 함길도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미 충청도 군병이 배 타고 경성, 후라도에 와서 정박하고 있다, 평안도황해도에서도 병사가 출병, 설한령을 넘어 우리도로 넘어와 도민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는 등의 선날승을 시전하여 민심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1467년 5월 초 길주에 와있던 함길도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의 모가지를 뎅겅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반란군의 진격과 진압 준비[편집]

강효문이 참수 당한 뒤, 중앙에서 임명되었던 길주 목사 설정신(薛丁新, 澄新), 부령부사 김익수(金益壽) 등의 모가지도 뎅겅당했고 이시애는 중앙에 사신을 보내서 '강효문이 한명회, 신숙주 등의 중신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해서 둘을 죽였습네다. 그래서 그 새끼 작업 좀 쳤습네다.'라고 하면서 반란 보고를 받은 조정의 높으신 분들에게 구라를 쳤다. 하지만 세조는 구라인 것을 알면서도 명분을 틀어 막기 위해 한명회, 신숙주등 반란군이 언급한 중신들을 구금하고 진압군을 편성했다.

그는 구성군을 함길도 + 강원도 + 평안도 + 황해도의 4도병마도총사로, 조석문(曺錫文)을 부총사로, 허종(許琮)을 함길도 절도사로, 강순+ 어유소 + 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아 6도 군사의 3만 대군을 절도사의 근거지인 함흥으로 출병했다. 한편 이시애는 단천, 북청, 홍원을 지나서 함흥으로 남하하면서 점령지에 파견된 관료들을 모두 죽이고 자기는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고 구라를 치면서 함흥을 점령, 관찰사 신면[2] 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을 체포했다.[3] 이러한 반란군의 기세 때문에 진압군 3만은 철원에서 더 이상 북상하지 못했다.

진압군의 북상과 기나긴 추격전[편집]

이에 세조는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鎭北大將)으로 임명, 평안도 병사 3천을 떼줘서 영흥으로 나아가게 하고, 병조참판 박중선(朴仲善)을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 황해도병 500명을 줘서 문천으로 들어가게 했으며 장군 어유소에게는 경병 1천을 줘서 구성군을 돕도록 했다. 이들의 지원을 받은 구성군은 5월 15일 회양군으로 이동했다. 세조는 항복하면 유혈사태는 없을 것이라며 회유책을 쓰면서 반란군 수뇌부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6월 1일, 구성군이 철령을 넘어 안변으로 들어갔을 때,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이시애는 200을 이끌고 마곡역에서, 이시합은 홍원의 하탄동에서 진압군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시합이 갑사 출신 차운혁(車云革)에게 잡혀서 위기를 겪나 했지만 바로 탈출에 성공해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이후 반란군은 함흥, 진압군은 영흥에 주둔하여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이에 세조는 회유책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뚝배기를 깨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세조의 분노에 대해 보고 받은 이시애는 갑자기 함흥에서 철수, 이성 다보동으로 탈주했다가 북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북청은 진압군과 반란군의 피 터지는 싸움 때문에 헬게이트가 되었다.

북청 케첩 파티[편집]

6월 19일 이시애를 추격하던 진압군이 함흥을 수복, 홍원으로 나아가서 서쪽 함관령[4] 아래 신원(新原)에 사령부를 세웠다. 구성군은 북청에 주둔한 반란군 뚝배기를 부수기 위해 강순을 선봉으로 보내고 종개령, 산개령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에 강순은 박중선, 허종, 어유소와 함께 종개령을 넘어 북청근처 평포(平浦)에 진을 쳤다.

근데 이시애 이 새끼, 6월 19일에 또 런한 다음 지 동생에게 2만을 주고 북청 근처 여주을현(汝注乙峴)에, 지는 단천 북쪽 군머와 야인 500여 명을 이성 고사리포(高沙里浦)에서 북청어소로 나아가 공격을 시도했다. 결국 진압군은 반란군이 만든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다.

강순은 김교의 건의를 수용, 나무와 대나무를 늘어놓고 참호를 파서 공격에 대비했다. 6월 24일 새벽 반란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진압군은 아닥으로 일관했다. 해가 떠오르자 함길도 사람을 시켜 이시애에게 사탕발림을 시전하니까 반란군의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했고, 이시애는 10여 차례 진압군을 공격했지만 쳐발렸다. 진압군은 이시애에게 대궐에 나가 자수하고 앙망문을 쓰라고 권유했으나 이시애는 씹었고 재정비를 했다.

7월 14일, 이시애의 사위 이명효가 홍원, 북청, 갑산, 삼수의 주민들을 모아 탕구령(湯口嶺)을 넘어 홍원서쪽 신익평(申翌坪)에 주둔, 진압군이 보급로로 사용하던 함흥 - 북청 통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이시합은 이성 이북의 주민들과 함께 마어령(磨於嶺)을 넘어 2개진을 형성, 이시애는 육진의 주민들과 함께 대문령(大門嶺)을 넘어 열여문평에 진을 쳐서 진압군이 말라 죽기를 기다렸다. 진압군은 이를 위해 북청 주둔군의 일부를 홍원으로 보내서 1, 2, 3진으로 나눴고 이시애는 이때를 노려서 북청을 점령했다. 회유책? 이제 할 만큼에서 깔끔하게 족쳐버리기로 결정했다.

7월 25일, 진압군은 야간에 몰래 강순의 1진으로 산개령, 어유소의 2진으로 종개령을 넘어 북청으로 들어가고 구성군은 평포로 들어갔다. 진압군은 산개령, 종개령에서 반란군을 격파, 이시애의 얼굴 마담이었던 유사 부절도사 유득지(劉得之)를 후드려팼고 이를 들은 이시애는 1만을 이끌고 북청 동쪽 만령(蔓嶺)으로 들어갔는데, 결국 반란군을 묶어버리는 병신짓이 되고 말았다.

진압[편집]

반란군이 만령으로 튀었네? 당연히 진압군은 허종, 우공, 어유소, 김교등이 각각 큰길남쪽 중봉, 큰길북쪽 중봉, 바닷가와 동령(東嶺), 북산(北山)에서 4방으로 만령을 포위했다. 그리고 반란군의 선봉대가 있던 주봉을 점령, 본대가 있는 중봉으로 나았다. 여기서 반란군은 2,000여기의 팽배대(彭排隊)로 부대를 3중으로 포위, 결사적으로 버텼지만 오후 5~7시쯤에 어유소가 동봉에서 후장을 관통, 반란군을 아주 뿅 가게 만들어줬다.

이시애는 밤을 틈타서 이성으로 도망갔지만 추격대를 피하기 위해 객사와 창고를 불 지르고 북쪽으로 빤쓰런을 시전했다.

8월 8일, 마운령[5] 찍고 영제원으로 도망갔고 단천의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추격대와 싸웠으나 쳐발렸다. 쳐발린 이시애는 길주로 도망갔고 진압군은 단천을 수복, 마천령까지 찍고 영동역에 이르렀다.

허종의 수하 허유례는 이시애의 애비가 이시애 밑에서 길주권관(吉州權管)으로 있음을 알고 위장 투항, 경성 운위원(雲委院)으로 들어가 그와 이시애의 수하 이주, 이운로, 황생을 구워 삶았고, 이시애와 이시합은 그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결국 8월 12일, 이시애가 참수를 당하면서 반란이 끝났다.

이후[편집]

반란 이후 반란군의 근거지였던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되었고 길주에서 영평령 이북 지역의 광대한 땅이 명천현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함길도의 이름은 이때부터 우리가 잘 아는 함도로 바뀌었고 종신 반역향크리를 먹었다. 그리고 반란의 원동력이 되었던 도내의 유향소 폐지, 토관제 폐지가 되는 동시에 함경도는 좌/우도로 나뉘어 통치가 강화되었다.

각주

  1. "수령 파견 문제는 몰라도 호패는 왜?"라고 물을 텐데 당시 함길도 호족 중에서는 사민정책으로 올라온 이주민들을 자기 세력에 두고 있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 호패 때문에 이주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에 시달렸다고.
  2. 《공주의 남자》에도 등장했던 신숙주의 아들이다.
  3. 얼마 못 가서 탈출했다.
  4. 함경남도 함주군 덕산면과 홍원군 운학면 사이에 있는 고개다.
  5. 이성과 단천사이에 있는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