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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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기 묘청의 난 진압이후 문신 김부식이 쓴 기전체 사서, 총 50권으로 본기 28권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시대에는 진지, 근엄을 한껏 빨고 써내려간 역사서였다. 유교의 영향을 받아 최대한 합리적인 시각에서, 우리나라 역사의 정사서로 써보겠다고 썼던 책이다.

보면 알겠지만 신라 건국부터 후백제 망할때까지의 거의 천년을 쓰는 사서인데 분량이 달랑 50권이다. 대충 이 시기와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중국의 사서인 한서부터 구당서, 신당서 기록을 합치면 1500여권 정도 된다. 저 사서들 추려서 기록한 자치통감 조차도 294권인데...아무리 대륙과 좆반도의 규모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좀 한국의 고대사 기록이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또 이 책은 고조선, 부여, 발해, 가야, 탐라 같은 나라의 기록을 생략하고 오로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후삼국만 다루어서 이런 애들 기록은 중국사서나 삼국유사, 일본서기, 당대 금석문이라도 뒤져야 한다.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왕 가운데 유독 기록이 많은 것도 광개토대왕릉비 덕이 크다. 누가 광개토대왕 기록이 많은 게 유기랑 신집 덕분이라 했는데, 정작 유기와 신집의 내용이 상당수 반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게 남아있다. 고구려본기 미천왕 이후 기록들이 다 이런 상태다. 그나마 길다 싶은 기록은 대부분이 중국 사서에서 인용한 기록이다.

신라정통주의라고 의심받거나 중화주의, 사대주의 사서라고 의심 받는 경우도 많은데 뭐 떡밥이라고 생각해두자. 오히려 분량상으로는 고구려가 700년에 본기 10권이고 신라가 거의 1000년에 12권이니 오히려 신라가 존속기간에 비해 내용이 창렬한거다. 그나마 신라본기 2권은 문무왕 본기라 다른 신라 55명 왕 기록은 10권밖에 안 된다. 열전도 비슷해서 10권 가운데 김유신 열전만 3권이다. 이건 뭐 외삼촌, 조카 분량만 1/10이여. 반면 백제 기록은 6권으로 700년 백제 역사가 김유신, 문무왕 분량에 맞먹는 기록 부족을 보여준다. 이것 때문에 백제 역사를 다룰때 유달리 일본서기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서기 자체가 백제잔당이 쓴 사서를 많이 인용해서 그렇다.

참고로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들은 신라의 인물이 대부분이다. 백제 인물은 2명, 고구려 인물은 3명 정도밖에 안된다. 분량도 압도적으로 밀린다. 기록이 너무 부실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씨발 ㅠㅠ 사마천처럼 전국유람이라도 해서 열전 적지 그랬냐

ㄴ근데 삼국사기를 쓸때 김부식이 너무 늙어서[1]전국유랑으로 텍스트 팍팍 구하고 싶어도 못했을거다.

오죽 기록이 없으면 위서 판정을 받은 화랑세기를 아직도 붙잡고 있겠냐, 캐안습이다.

솔직히 국뽕 교사들은 헛소리를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헬반도에서는 딱히 진실만을 쓰겠다는 정신 따위 없었다. 짱깨 빠는 유교충들 때문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는 하나 고려의 전체적 기풍이 일단 그렇게까지 짱깨를 빠는 것은 아니었고 우덜리즘이 강했기 때문에 걍 우덜식 사상관(당연히 당시 헬고려 우덜 사상에서 진실만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새낀 없었다. 기록하는 새끼 마음임.)에 따라 기록되었다. 후기에도 영향을 끼친 칭챙춍 대장을 먹은 원나라도 굳이 진실만을 추구하겠다는 정신 따위 없었다.(그래서 원 때 쓰인 사서에는 상대적으로 더 심각한 오류가 많은 편이다.) 특히 삼국사기는 복붙도 있고 일단 신라에 유리하게 주작질로 시작해서 기록의 신뢰성이 좀 떨어진다. 걍 지 마음대로 기록했다고 보면 된다.

ㄴ다만 이 부분은 사료 부족으로 예전 기록들을 냅다 붙인 것 때문이지 의도적인 감삭이 들어갔다고 100% 확신할수가 없다. 일례로 고구려 기록은 고구려 영양왕대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 신집을 옮겨 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신라나 백제 기록들도 기록들의 부족으로 금석문들을 참고한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 그리고 신라가 통일해서 신라본기가 가장 많은거지 통일이전 분량은 고구려가 더 많다. 그외 기록들도 "이런 이런 책에서는 이런 말이 있던데 뭔 개소린지 모르겠다." 같이 출처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 오히려 사관의 론을 보더라도 신라측에 편향되었다고는 볼수가 없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에 대해서도 "그새끼는 중국입장에서는 영웅이지만 우리입장에서는 개새끼다."라고 써놓기도 했고 "중국을 물리친 안시성주의 이름을 알수가 없으니 한탄스럽다."같이 고구려에 대해 우호적인 사론들도 상당수 남았기 때문.

ㄴ 삼국사기 안 읽어본 거 티내고 있네. 주작질은 개뿔. 주작질을 했음 왜한테 수시로 털리는 기록 등 신라에 불리한 기록은 왜 적어놓았겠냐. 게다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건 중 포상팔국의 난[2]처럼 연대는 맞지 않을지언정 고고학적으로 교차검증이 되는 사례도 있는데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물론 건국연도 주작은 사실이긴 하다. 초기 군주들 수명이랑 재위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서.

사실 사료적 엄정성은 후대의 삼국사절요동사강목이 더 낫다는 얘기도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김부식이 직접 쓴 판본은 당연히 없어졌고 조선 극초기에 진의귀와 김거두가 복원하였고 지금 남은 가장 오래된 판본은 중종시기 이계복이 진의귀와 김거두가 복원한 판본을 약간 첨삭한 버젼중 일부인 옥산서원본[3]과 정덕본을 적절히 스까서 쓰고 있다.

국뽕 기질도 좀 있다. 별 근거는 없지만 관구검을 2번이나 털어서 병력들도 거의 다죽였는데, 막판에 크게 져서 고구려 수도가 털렸다든지. 중국 사서엔 좀 더 말이 되게 나와있는데, 걍 2번 패전이 없고 소규모 고구려군 때려잡으며 연전연승하다 막판에 보기 1만 명으로 고구려군 보기 2만 명 털고 수도를 털어버린다.

ㄴ 근데 삼국사기 기록이 상세하고 삼국지 기록이 간략한 걸 보면 삼국사기가 중국 사서에 없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삼국사기는 자세한 전투과정이 나와있는데, 삼국지는 환도성 털고 고구려왕 추격하고 기공비 새기는 내용이 전부라서. 뭐 양맥에서 싸워서 고구려군을 연달아 격파했다는 내용이랑 옥저에서 3000급을 베었다는 내용도 있지만 그거 외에는 썩...

삼국사기가 술이부작(述而不作) 정신으로 다듬어 정밀한 것과는 별개로 고구려본기 제외한 나머지 본기는 초기기록 연대가 고고학 자료와 맞지 않고, 초기 군주들의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는 부분이 많아 초기기록의 신뢰성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기원후 1세기에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나오는데 고고학 자료 조사 결과 기원후 5세기까지도 마한이 존속한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 있다. 이에 대해서 백제가 마한을 복속만 시켰을 뿐 직접지배를 하지는 않았다면서 초기기록을 긍정하는 의견과 고이왕대의 기록이 온조 대로 소급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기록의 연대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참고로 이 점 때문에 일제시대 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불신론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논파되었다.

여담으로 삼국사기엔 고구려 건국년도가 기원전 37년이라 쓰여있으나 고고학 자료 조사결과 고구려의 건국년도가 기원전 3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다고 밝혀졌다.

  1. 고려시대 금수저들 평균수명이 39.7세고 삼국사기 편찬시 김부식은 62세가 훨씬 넘었다. 참고로 이양반 64세던 1142년에 정계은퇴했다.
  2. 삼국사기 기록상 내해 이사금 14년인 209년에 경남 해안가에 있던 변한의 여러 국가들이 안라국(or 가라국)을 공격한 사건. 안라국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와 지원을 요청했고, 내해 이사금이 왕손 내음과 태자 석우로를 보내 포상팔국의 군대를 격파시킨다.
  3. 메인소스인데 오탈자가 너무많아서 정덕본과 섞어 오탈자를 걸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