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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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태평양 전쟁의 일부)
1945년 5월 18일 오키나와에서 교전중인 미 해병대
1945년 5월 18일 오키나와에서 교전중인 미 해병대
날짜 1945년 4월 1일 ~ 6월 23일
장소 일본 제국의 기 일본 제국 오키나와
결과 연합군의 승리, 일본 본토 진공 최전선 확보
영토 변화 미국이 1972년까지 오키나와를 점령함
교전국
육상 병력:

미국의 기 미국
해상 병력:
미국의 기 미국
영국의 기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의 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기 뉴질랜드
캐나다의 기 캐나다

일본 제국의 기 일본 제국
지휘관
미국 사이먼 B. 버크너†
미국 로이 가이거
미국 조지프 스틸웰
미국 체스터 니미츠
미국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영국 버나드 롤링스
일본 제국 우시지마 미쓰루†
일본 제국 조 이사무†
일본 제국 야하라 히로미치
일본 제국 이토 세이이치†
일본 제국 오타 미노루†
일본 제국 고무라 게이조
병력
수송선 158척 및 LST 184척
LSM 89척
전함 18척
항공모함 40척
구축함 200척
함선 1300척
전투병력 18만 3000명

총 병력 54만 1000명

육군 9만명
해군 20,000명
오키나와 주민 방위대 3만명

총 병력 14만명

피해 규모
미국 전사 27,580명
부상자 40,345명
일본 제국 전사 74,166명
민간인 사망자 95,000명[1]
부상자 78,000명
포로 7,400명


개요[편집]

일본군의 패망이 존나 가까워진 사건으로 항복까지 초읽기에 들어가진 전투.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해전이며 이 이후는 일본의 본토 공격이라 사실상 이 전투에서 일본이 지면서 전쟁은 끝난거나 마찬가지였다.

배경[편집]

원래라면 미국과달카날 전투 이후 중국군과 손잡고 대만을 따먹은 다음 한반도 남부로 진격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점령한 후 부산을 거점으로 일본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으로 중국이 해안지역을 싹 다 날려버리자 좆빠지게 대만을 따먹어봤자 중국군이랑 연합할 통로 자체가 없어져서 걍 바로 오키나와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뻘짓으로 괜히 일본 본토 진격 시간만 앞당겨진 셈. 니미츠 제독은 오키나와의 전략적 이점을 주장하며 오키나와 점령을 주장했고 이는 승인되어 1944년 10월 3일 미국 합동참모부로부터 1945년 3월 1일 오키나와로 진격하라는 승인을 받게 된다. 하지만 물자수송에 차질이 생겨서 예정보다 한달 밀린 1945년 4월 1일 미국은 오키나와로 진격한다.

진행[편집]

전쟁 전 준비[편집]

당시 일본군은 이미 연합군에 비해 모든 방면에서 열세였다. 해군은 항공모함이 한 척도 없었고 남은거라고는 땅깨들 뿐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제대로된 땅크조차도 없어서 순전히 포병뿐이었다. 그나마 포병전력은 넉넉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당시 첩호 작전이라고 예상되는 연합군의 진격 루트에 병력을 깔아놓고 그 지역으로 연합군이 진격하면 그쪽으로 모든 가용가능한 병력을 다 때려박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참고로 첩1호는 필리핀 루트, 첩2호는 큐슈 및 오키나와, 대만 루트였고 첩3호는 혼슈, 시코쿠, 오가사와라 루트였으며 첩4호는 홋카이도 루트였다. 그런데 미국은 1944년 10월 필리핀으로 진격했고 첩1호가 발령되었으나 여기서 개박살이 난다(레이테 만 해전) 결국 첩호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대본영은 새로 천호 작전이라고 새로운 방어전략을 짜는데 천1호가 오키나와 루트였다. 1945년 4월 1일 연합군이 오키나와로 밀려오자 일본군은 천1호를 발령했는데 문제는 천호 작전도 첩호 작전과 마찬가지로 한 곳이 공격받으면 다른 곳에서 일제히 전력들을 다 꺼내서 집중방어하는 구조인데 필리핀은 이미 박살났고 대만은 대만항공전으로 전투기 다 태워먹어서 남은거라고는 본토에 있는 항공전력 뿐이었다.

파일:150-mm-japanese-gun-okinawa.jpg
당시 일본이 동굴에 숨겨둔 89식 150mm 주포

그~나마 필리핀으로 가는 해상경로가 어려워지자 필리핀으로 배송될 포병전력들이 죄다 오키나와로 빠꾸해서 포병전력은 생각보다 널널했다고 한다. 그것도 100mm 야포와 150mm 곡사포, 98식 중박격포 등 미군들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전력들이었다.

오키나와 대공습[편집]

1944년 10월,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한 이후 필리핀으로 진격하는데 있어서 일본군들이 필리핀 수비의 거점이 될 수 있는 난세이 제도에서 대만까지 숨어있는 일본군의 주요 기지들을 박살내야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일환으로 오키나와부터 먼저 폭격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 10월 10일 새벽 6시 미국 폭격기들은 오키나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당시 일본군은 오키나와에서 훈련을 하기 위해 각 지역의 사령관들이 모여서 대규모 훈련을 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폭격기가 날아다니니까 처음에는 훈련인줄 알고 미온적으로 대응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사령관들이 한곳에 모여있으니까 지휘체계가 박살나서 대응도 중구난방으로 하다보니까 더더욱 대응을 못하다가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다.

지상전[편집]

게라마 제도 상륙전[편집]

미군은 오키나와 본토에 상륙하기 이전에 후방에서 뒷통수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게라마 제도를 먼저 점령하기로 결정하였고 1944년 3월 26일 게라마 제도를 공격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은 오키나와 본토조차도 제대로 사수하지 못할 병력인데 주변 섬들을 뭐하러 지키냐면서 제대로 수비대조차 보내놓지 않았고 가용 병력들을 모조리 오키나와 본도에 다 때려박은 상태였기에 매우 손쉽게 게라마 제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게라마 제도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이미 일본군들이 "귀축영미에게 잡혀 포로가 되는 것은 죽는것보다 더 치욕스럽다"라고 세뇌시켜놨기에 미군이 상륙하자 집단 할복자살했다고 한다.

게라마 제도를 장악한 미군은 오키나와 본도에까지 폭격할 수 있는 대포를 설치할 수 있었고 함포 사격과 함께 오키나와로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오키나와 북부 전투[편집]

파일:Marines land on Okinawa shores.jpg
오키나와 해변에 상륙한 미 해병대

오키나와 주변 섬들을 완전히 점령하여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연합군은 마침내 예정된 L-Day인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북부의 가데나 만으로 상륙했다. 그러나 이오지마 전투에서처럼 일본군은 처음부터 연합군의 상륙 저지를 포기하고 남부로 죄다 몰려가서 집단적으로 방어태세를 마련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은 순식간에 북부지역의 주요 거점을 점령했다.

이오지마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은 고지에서 동굴을 파서 고지로 올라오는 미군들에게 기습적으로 포격을 퍼붓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미 미군들은 이오지마에서 똑같은 전술로 지옥을 경험해봤기에 두 번 연속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파일:OkinawaMarineCaveDemolition.jpg
일본군들이 파놓은 동굴을 폭파시키는 미 해병대

그나마 북부 일본군 주력이 모토부 반도의 야에다케 산에 있어서 연합군이 모토부 반도를 점령하는데는 애를 먹었지만 이오지마에서 얻은 교훈으로 함포사격으로 존나 갈기고 화염방사기와 수류탄으로 동굴마다 하나하나씩 박살을 내니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오키나와 남부 전투[편집]

미 해병대 6사단이 북부를 점령하는 동안 육군 96사단과 7보병사단은 남부로 진격했는데 문제는 일본군이 남부로 오는 험한 길목마다 방어선을 여러개를 만들어놓고 후퇴하는 척 하면서 미군을 끌어들였다가 야간에 기습을 하는 작전으로 미군의 혼을 빼놓았다.

파일:US Flag raised over Shuri castle on Okinawa.jpg
슈리 성에 성조기를 꽂는 미군

또한 일본군은 과거 류큐 왕국이 사용하던 성들을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했는데 류큐 왕국의 궁성이던 슈리 성을 최종 방어선으로 하여 마치 중세시대 공성전을 하듯이 전투를 했다. 실제로 이 방식이 보병들에게는 꽤나 피해를 입혔지만 미 공군의 압도적인 폭격 화력으로 결국 완전히 박살났다. 이때 파괴된 성들은 아직까지도 복구중이다.

해상전[편집]

기쿠스이 작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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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에게 항공모함은 단 한대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에 비해 미군은 항공모함을 수십척이나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다가 추가로 영국 해군 항모전단까지 참전해서 어마어마한 해군 전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전력의 열세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은... "카미카제"였다.

파일:Chiran high school girls wave kamikaze pilot.jpg
오키나와로 향하는 카미카제 특공대를 환송하는 일본 여고생들

일본의 전략은 우선 제해권과 함대 방어전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야마토를 비롯한 전함들을 고정포대로 사용하여 연합군 함대를 유인한 뒤 대공포로 연합군 전투기들을 요격하여 미 함대의 대공방어선을 분쇄한 뒤 카미카제로 항공모함을 격침시킨다는 순전히 사람목숨과 공격을 등가교환한다는 정신나간 전략을 사용했다.

파일:USS Bunker Hill hit by two Kamikazes.jpg
당시 카미카제 공격을 받은 USS 벙커힐(CV-17)

물론 실제로 카미카제 공격은 미 함대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고 서양 철학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전술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미군들이 상당했다. 하지만 조종사들 목숨과 항공모함을 등가교환하기에는 미 항공모함이 상당히 많았다... 당시 호위항모까지 합하면 100척도 넘었다. 결국 이 작전으로 일본은 수많은 조종사들만 잃었다.

보노미사키 해전[편집]

야마토 최후의 전투.

당시 일본 해군의 자존심이자 훌륭한 수상호텔로 사용되던 야마토는 일본 해군이 전멸위기에 처하자 그 책임을 지고 마지막 총옥쇄를 위해 싸우다가 죽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게다가 당시 야마토를 운용하기 위해 필요한 중유도 바닥이 난 상태였기에 일본 해군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야마토를 써먹고 처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린 명령이 오키나와까지 가는 편도 연료만 채운 뒤 오키나와 해안에 고의로 좌초시켜서 오키나와로 오는 연합군 항공기들과 함대를 방어하라는 작전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딴 방식으로 수백척의 연합국 함대를 막을 수 있을리가 없었고 아무도 야마토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 해군은 전멸위기였고 천황에게 "우리가 야마토까지 써가면서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이겨내지 못했습니다"라고 뭐라도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야마토를 희생시킨 것이었다.

<youtube width="" height="">t5IJyM_Zzqs</youtube>
텐고쿠 작전
파일:Curtiss SB2C Helldiver prepares to attack the Japanese battleship Yamato on 7 April 1945.jpg
수상호텔에서 수중호텔로 업종변경중인 야마토

그러나 오키나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찰하던 연합군의 정찰기와 잠수함에게 발견되었고 호넷을 비롯한 수십척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에게 융단폭격을 쳐맞고 야마토의 탄약고가 피격당하면서 버섯구름을 피어올리면서 허무하게 침몰하고 만다.

수중호텔이 되어버린 야마토

참상[편집]

오키나와 원주민들이 겁나게 피해를 봤다. 미개한 좆본군 새끼들이 미군이 오기 전까진 너넨 2등 국민이니 존나게 삽이나 푸라고 채찍질했다. 심지어 앞에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뒤에서 총을 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키나와 주민들 중에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강제로 징집했으며 이중에는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들도 있었다.

파일:Childsoldier In Okinawa.jpg
오키나와의 소년병들
파일:Himeyuri Students.jpg
오키나와에서 징집된 여학생들

당연하게도 소년병을 차출해서 총알받이로 사용했으며 이들을 철과 피로 천황을 지킨다는 의미로 철혈근황대(鉄血勤皇隊)라고 불렀다. 남자아이는 총알받이로 사용했고 여자아이는 간호요원으로 쓰거나 위안부로 사용했다. 이때 징집된 여학생들은 히메유리 학도대(ひめゆり学徒隊)라고 불렀다.

또한 미군이 뿌리는 삐라를 줍거나 오키나와의 토종어인 류큐어를 사용하는 원주민들은 미군의 첩자로 몰아서 죽이거나 강간했다. 이쯤되면 걍 오키나와를 약탈하고 싶었던건 일본군 아닌가?

또한 일본은 오키나와 원주민들을 세뇌시켜서 "미군에게 붙잡히면 고문당하다가 죽으니까 포로가 되지 말고 일본인으로서 명예롭게 자살해라"고 지시를 내렸고 실제로 이 지시때문에 수많은 오키나와 원주민이 서로 죽고 죽였으며 심지어 아들이 어머니를 때려죽이고 아버지가 자식들을 때려죽이는 참상까지 벌어진다. 정작 미군들이 고문은 커녕 자신들에게 식량과 의약품을 나눠주며 극진히 대접해주니 일본군에게 속아 가족을 죽인것이 너무 분해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미국 드라마 더 퍼시픽에 이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드라마상의 창작같은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 이거다.

이렇게 오키나와 주민들을 소모품 취급하던 일본군과 달리 정작 미군들은 점령지민들에게 식량을 균등배분하고 청장년층들중 일감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약간의 식량을 더 주는 대가로 일을 시켰다. 보통은 농사나 가축을 돌보는 비교적 쉬운 일을 했지만 일부는 자원해서 미군 보급품을 전방까지 운송하기도했다.

영향[편집]

오키나와 전투에서만 5만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미군은 일본 본토 침공에 들어갈시 엄청난 사상자가 나올것이라는걸 깨달아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떨구게 되었다.

여담[편집]

영화 핵소고지의 배경이 오키나와 전투 이다.

둘러보기[편집]

태평양 전쟁
1941년 진주만 공습 · 제1차 괌 전투 · 웨이크 섬 전투 · 말레이 해전 · 싱가포르 전투 · 자바 해전 · 실론 해전
1942년 둘리틀 특공대 · 산호해 해전 · 미드웨이 해전 · 사보섬 해전 · 동부 솔로몬 해전 · 산타크루즈 해전 · 테나루 전투 · 타사파롱가 해전
1943년 비스마르크해 해전 · 애투 섬 전투 · 콜롬방가라 해전 · 타라와 전투
1944년 글로스터 곶 전투 · 헤일스톤 작전 · 임팔 전투 · 사이판 전투 · 필리핀해 해전 · 제2차 괌 전투 · 펠레리우 전투 · 앙가우르 전투 · 대만 항공전 · 필리핀 탈환전 · 레이테 만 해전 · 일본 본토 공습
1945년 람리섬 전투 · 페낭 해전 · 도쿄 대공습 · 이오지마 전투 · 오키나와 전투 · 구레 군항 공습 ·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각주

  1. 이 중 조선인 사망자도 최소 701명 이상인 것으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