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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이 틀의 주인공이다.

이능룡(기타), 이석원(보컬,기타), 전대정(드럼)

개요[편집]

한국의 밴드. 완벽주의를 가장한 편집증 환자 이석원을 중심으로 1994년에 결성하였다.

한국 인디 록 음악씬에 모던록, 기타팝을 최초로 도입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처음으로 창작이란걸 본격적으로 한 밴드다.

                                                                           ㄴ 90년대 당시 홍대 밴드씬 안에서 얘기다. 

간단한 코드진행과 뛰어난 멜로디로 듣기 편하고 귀에 확 들어오는 음악을 만든다.

특히 언니네이발관의 장기인 '필살의 멜로디'는 정말 끝내준다.

리더 이석원은 우리와는 다르게 아주 될놈 of 될놈이다

금수저로 태어나서 20대 중반에 밴드맨 모아서 앨범 하나 만들었는데 그게 엄청 잘 팔리고(물론 대중적인 인지도는 없지만)

비록 2집 실패했어도 3집 이후로는 꾸준히 잘팔리고 특히 5집은 무려 15만장(2013년 기준)이나 팔렸다 이게 엄청 의미있는게 디지털 음원시대가 되면서 요새 인기있는 가수들도 꼴랑 몇만장 팔렸다고 좋아하는데 15만장이면 어마어마한거

그래서 음악 20년 하는동안 앨범은 고작 정규 5장에 싱글 한 장 내놓고도 잘 먹고 잘 산다. (싱글남이라 크게 돈쓸 일도 없어 보인다)

멤버[편집]

이석원[편집]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게 이석원은 한 곡 만들때 한땀한땀 짓느라 오래걸린다고 알고 있는데 개소리다

노래는 존나 많이 만들었는데 풀지를 않는다. 심지어 다 녹음해놓고 발매일 기다리는데 엎고 다시 작업하는 등 진짜 미친건가 의심하게 한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디 라디오 나오면 맨날 언급하는 일화가, 어렸을 적 록키를 보고 서바이버의 Eye of tiger가 너무 좋아 테이프를 무한 반복해가며 들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누나가 '너가 그 노래를 일주일 뒤에 들어도 좋을 거 같아?'고 물었고 이석원은 그 순간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진짜 나중에 가니 질렸다고. 자기 인생 최초의 상실감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그리고 밴드 활동을 시작한 뒤엔 더 이상 예전처럼 음악을 진심으로 즐길 수 없게 됐다고 맨날 얘기 해 왔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의 대학교와 병역 관련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등학교 졸업 이후 별 거 안 한 것으로 보이며, 병역도 면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20대 초반에 정신과 병동에 입원까지 했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병역과 학력이 공란으로 남은 것인듯 하다.

이후 부모님이 차려준 레코드 가게에서 사장 노릇 하며 PC통신 시절 음악 게시판에서 좆문가 악플러로 활동한다. 당시 신해철의 넥스트 앨범이 앨범의 곡들 간에 유기성이 없다.는 이유 등을 들며 극딜하는 글을 싸서 신해철이 극대노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후 이석원이 밴드를 결성하고 활동하게 되며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느껴 사과 메일도 보내고, 신해철에게 언니네이발관 3집 광고 나레이션을 맡기는 등 적극적으로 화해 제스처를 보내자 신해철도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 내가 졌다"식으로 화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신해철에 대해 애증 비슷한 애틋함이 있었는지 신해철이 혼수상태일 때부터 사망한 뒤까지 며칠에 걸쳐 일기에 자기 심경을 적기도 했고, 후일 진중권의 팟캐스트에 나와서 신해철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흑흑.

하여튼 존나 독불장군이다. 음악적으로 밴드 멤버와 곡을 합작을 할지언정, 실질적으로는 언니네이발관은 이석원 그 자체다.

특히 5집을 만들기 전까지 언니네이발관 음악=이석원 그 자체였다. 2집 기타리스트였던 정바비도 이석원이 이렇게 해라 말하면 그 것에 맞춰서 곡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칰빠라는 점만 봐도 얼마나 고집불통 미친놈인지 알 수 있다.

넥스트 앨범의 유기성 결여를 깠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앨범이나 책을 만들 때 내용물의 연결성을 굉장히 중시한다. 산문집인 '보통의 존재'는 책이 출판 된 이후에도 증쇄를 할 때마다 글의 서순을 바꿔대기도 했고 이후에 소설을 쓸 때에도 그 짓을 하려다가 출판사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는 그런 성향이 극대화 돼서 아싸리 한 권의 책처럼 순차적으로 연결되게 만들었다고 한다.

'록 아티스트는 나이가 들면 창작력을 잃어버린다.'는 걱정을 해 왔고, 실제로 자신이 음반 작업 속도가 점점 늦어지자 막연한 걱정이 현실이 되어 간다고 느껴 음악 대신 지속할 수 있는 창작 활동으로 글을 선택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적은 첫 책인 <<보통의 존재는>> 8년이 지난 지금도(2017년) 교보문고 시/에세이 부문 베스트 셀러 30위에 올라와 있다.

소설 <<실내인간>>도 지었는데 보통의 존재가 너무 유명해서인지 먼지가 되어버렸다. 본인도 안 팔려서 버린 자식이라고 하고, 소설을 쓰는 일엔 재능이 없다고 느꼈다고 이야기 한다.

세번째로 낸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책이 나온지 2년이 지난 지금 교보문고 시/에세이 부문 베스트 셀러 40위에 올라있다ㄷㄷ

이능룡[편집]

정바비가 탈퇴한 뒤 오디션을 통해 영입된 기타리스트. 홈페이지 일대기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걸 포기한 순간 기적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5집, 6집 전곡에 걸쳐 이석원과 공동 작곡을 했고, 전곡을 단독으로 편곡했다. 그만큼 5집과 6집에서 이능룡의 음악적 공헌은 지대하다. 6집 녹음때는 기타, 코러스, 프로그래밍, 키보드 다 해먹었다. 당연히 이석원이 보여준 편집증적 집착의 최고 희생양이기도 하다. 근데 공개되는 앨범 녹음 스케치들을 보면 이 쪽도 고집이 장난이 아니다. 이능룡도 비슷하게 음악적 집착이 심한 과라서 그 오랜 시간 함께 작업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아닌게 아니라 4집 이후 이석원이 하라는 음악은 안하고 카페를 여는 등 작업이 붕 뜨게 되자 밴드를 탈퇴하기도 했었고, 공연 전 날에 기타에 불 지르곤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작업 스케치만 봐도 이쪽도 고집이 장난 아니다.

이석원은 칰빠고, 이 쪽은 기아 빠다. 한 때 '동렬이 형이 기아 감독으로 오시면 좋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고 하는데, 부끄러울 것 같다.

전대정[편집]

다른 멤버 두 명과 굉장히 이질감 있게 생겼다. 이석원, 이능룡 둘 다 생긴건 섬세해 보이는데 전대정은 곰 그 자체다. 드럼과, 공연에서 이석원과 투닥대는 역할을 맡고 있다. 커엽다.

원래 메탈 밴드에서 드럼을 쳤다가 회의감이 들어 탈퇴하고 언니네이발관 오디션을 봤는데, 전대정의 팝터치가 맘에 든다며, 당시 그가 미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입시켰다 한다.

세션[편집]

유정균[편집]

세렝게티의 보컬. 5집, 6집 녹음을 비롯해 공연에도 참여하는 준 정규 멤버. 이석원이 말하기를, 베이스는 잘 치면서도 정규 멤버는 아니기에 자기에게 토 달지 않아서 좋다고 한다.

임주연[편집]

박민우[편집]

6집 제작 즈음해서 키보드 세션으로 새로 참여했었다.

네이버 온스테이지 촬영 시 참여했으며, 6집의 유일한 라이브였던 2016 GMF에도 참여했다.

전 멤버[편집]

유철상(김반장)[편집]

1집 당시 팔이 길다는 이유로 드러머로 낙점됐다. 흑인음악을 하겠다고 밴드를 탈퇴한 뒤 아소토 유니온윈디시티 등의 활동을 했다.

흑인음악의 저항정신에 입각해 나혼자 산다에도 출연했다.

정대욱(정바비)[편집]

언니네이발관이 출연한 라디오 프로를 듣고 그들의 음악에 반해 이석원이 활동하던 음악 동호회 채팅방에서 '나도 밴드 하면 안되냐'며 구애해 기타리스트로 가입한다.

2집까지 함께 했으며, 특히 2집은 이석원이 '이석원과 정대욱의 콤비 플레이'라고 칭할 정도로 정대욱의 기여가 컸던 음반. 그러나 안그래도 이석원의 독재체제에 힘이 들던 와중에 2집이 좆망하면서 자연스레 정대욱은 탈퇴하고 제 갈 길 가게 됐다.

4집 이후 이석원과 이능룡의 갈등으로 이능룡이 밴드를 떠났을 때, 대신 기타를 쳐주기도 했다. 이 즈음해서 이석원과 정바비 둘이 함께 인터뷰도 했다.[1] 이능룡과 싸운 직후에 한 인터뷰라 노골적으로 정대욱 칭찬해주는 느낌이라는 썰도 있다.

밴드의 역사[편집]

http://www.shakeyourbodymoveyourbody.com/mainframe.asp

여기서 이석원의 일기와 밴드의 일대기 등을 볼 수 있다.

결성과 1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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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통신 시절 음악 동호회에 기웃거리며 좆문가 행세를 하던 이석원은, 당시 PC통신을 이용하는 실제 음악인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언니네이발관이라는 밴드를 하고 있다는 구라를 친다. 언니네이발관은 이석원이 본 세미포르노[2] 영화에서 따왔다고 한다.[3]

그리고 네임드화 되어 라디오에 출연하게 됐는데, KBS 공중파 라디오 '전영혁의 음악세계'에서까지 밴드를 하고 있다고 공식적인 구라를 치게 되었고, 이름값 하기 위해 진짜로 악기 주자 구해서 밴드를 결성한다. 그리고 이듬해 동일한 라디오 프로에 재출연해 자작곡을 소개한다. 이 방송을 듣고 정대욱이 기타리스트로 합류한다.

이석원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 밴드들은 외국곡 카피하기에나 급급했고 자작곡은 음반 낼 때나 낼 수 있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고, 언니네이발관은 그 와중에 첫 공연부터 자작곡으로 세트리스트를 모두 채운 최초의 밴드였다고 이야기 한다. 당시의 그런 풍토를 비판한 곡이 1집 수록곡 [로랜드 고릴라].

내가 처음 너를 봤을 때
너가 하는 일이라곤
남의 흉내 내는 것

최초의 라이브 공연은 클럽 드럭에서 이루어졌는데 처음 공연을 하겠다고 했을 때 클럽 측에서 '우리 애들은 자작곡을 할 실력이 안 되는데, 너희가 자작곡을 해버리면 우리 애들이 위축 돼 버릴 수 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언니네이발관은 '우리는 허접이다.'를 어필하기 위해 노력해서 겨우 공연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4]

그 공연이 대성공해서 데모 앨범도 동나고 메이저 기획사에서도 러브콜을 받아 음반을 낼 수 있게 됐다. 런던 메트로폴리스 스튜디오에서 마스터링을 하는 등 정성을 들여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를 발매한다.(1996년)

언니네이발관은, 상업성 추구하는 밴드 보면 물어뜯지 못해 혈안인 병신 힙스터 인디충 새끼들의 아이돌이지만 정작 이석원은 그놈의 인디타령 싫어한다고 맨날맨날 얘기한다. 상업적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어필할 수 있는 곡을 쓰고 싶어 했고 외국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마스터링하는 등의 모습은 그 알량한 인디 아마추어리즘과는 거리가 있다.

하여간에 1집은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흥행했지만, 기타 정대욱은 고3 수험생활을 위해, 드럼 유철상은 흑인음악 하겠다며, 베이스 류기덕은 게임회사에 취업을 하는 등 각자 제 살길 찾아 떠나면서 밴드가 텅 비게 됐고 1997년 한 해는 쉰다. [5]

2집[편집]

정대욱은 연대 합격해서 금의환향하고, 노이즈가든 출신의 이상문이 베이시스트로 김태윤이 드러머로 합류해서 리듬 파트도 매꿔져 2집을 준비한다. 이석원의 표현대로 '이석원과 정대욱의 콤비플레이'로 2집이 완성됐지만 이번엔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실패한다. 이 탓에 밴드 활동을 중단하게 되고 정대욱은 밴드를 탈퇴, 이석원은 IT 기업에 입사한다. ㄴ2집이 비평적으로 전혀 실패하지 않았을건데? '한국인디 20년 우리가 기억해야할 100장의 음반'에서도 후일담이 19위로 랭크됫고, '어제만난슈팅스타', '후일담' 같은 개십띵곡이 있는데.. [한국대중음악100대명반]에도 1집과 함께 선정된바 있다.(2007이긴한데;) ㄴ 존나 한참 뒤에 재평가된 거고 그 당시에 1집이랑 비교했을 때 비평적으로 실패한 거 맞다.

3집 ~ 4집[편집]

아픈 강아지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밴드를 재가동해서 3집을 내게 됐다고 한다. [6]

정무진이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합류하고, 본격적으로 다시 활동하기 위해 오디션을 통해 멤버를 구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능룡과 전대정이 가입한다. 당시의 일기에서 이석원의 심경을 느낄 수 있다.

2002년 3월 2일
무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기타 오디션 지원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누굴까. 어떤 사람일까. 
희망이 되려나 절망이 되려나... 
2002년 3월 14일
참, 그러고보면 새 기타 능룡이란 놈 되게 웃긴다. 
톰슨가젤처럼 생겼지만 아주 음흉하다못해 
음험하기까지 한 놈이다. 
마징가제트를 본 놈이 찐빵로봇을 모르고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봤다면서 김상순을 
모른다니 말이되나. 
그래 퍼뜩 오디션날이 생각났다. 
오디션이 있던날 삽겹살을 사주며 이것 저것 
면접삼아 물어보는데 내가 "스포츠는 별로 안좋아하지?" 
하니까 정색하며 "아녜요 좋아해요" 하던게 생각나서 
"너 진짜 스포츠 좋아해?" 다시 물으니 
진짜로 좋아한다며 손사레를 친다. 
"그럼 내일 튀니지전 몇시야?" 
"그, 그건...." 
"나아참.. 너 스포츠 안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안 뽑을까봐 좋아한다고 그런거지?" 
"아니에요. 진짜 좋아해요." 
"얘 이거 뽑히려구 일기 검토한거 아냐?" 
옆에 있던 애들 흥분한 나를 말린다. 
"알았어. 기타나 잘쳐" 
"네.." 
사실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첫인상관 달리 살짝 살짝 기행을 보이기 시작하는 
능룡이의 모습에 일말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요즈음이다. 
스뽀쓰는 몰라도 좋다. 기타만 잘 쳐다오. 

3집은 대성공했고, 이어지는 콘서트 등 활동도 성공했다.(2002~2003)

허나 2집 당시의 베이시스트였고 이석원의 절친이자 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상문이 숨을 거두는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2003.08.18) 이석원은 또한 이 즈음에 이혼을 했을 것이다.

이런 배경과 더불어 이렇다할 활동이 없었던 1,2집과는 달리 수백번의 라이브를 거친 다음, 2004년에 4집 순간을 믿어요를 냈다.

그리고 2006년엔 이석원이 인사동에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이라는 카페를 개업하는데, 작업은 안 하고 가게 운영에만 몰두하자 이능룡이 빡쳐서 밴드를 탈퇴하는 일도 일어난다.

능룡이가 나간댄다.
너무 짜증이 나서 왜냐고 묻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한테 넌덜머리가 났겠지.
근데 너 그거 아니. 나또한 너한테 얼마나 질렸는지. 
미련같은거 없다. 너한테도 이발관도 음악도. 

어쨌든 화해하고[7] 5집 준비하는데, 이석원의 편집증이 이 시기에 만개한다.

5집[편집]

원래부터 작업에 강박이 있었는데, 정점을 찍은 것이다. 본인의 말로는 나이가 들어 창작력이 떨어져 그렇다고도 한다.

심지어 앨범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쇼케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5집을 사실 다 만든 상태여서 이제 됐구나! 하고 이석원이 앨범 쇼케이스 진행을 했는데, 나중에 이석원이 '이거 아닌 듯?' 그런데 이미 저질러는 버렸는데 공연장 예약 취소는 안 됐고, 결국 앨범 내놓지도 않고 쇼케이스를 진행 한 것이다.

이석원 왈, 자기에게 음악을 만드는 일은 계속되는 선택의 과정이라고 말을 하는데 녹음 수십 수백 테이크 해놓고 그중에 괜찮은거 고르고, 마스터링도 수십번씩 해가면서 그중에 맘에 드는거 고르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보니 작업이 늦어진거 같다.

광적 집착의 작업 과정을 거쳐 2008년 8월 8일에 드디어 5집 가장 보통의 존재가 나온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6집부턴 가벼운 맘으로 만들려 한다.'며 1년 내외로 6집을 내겠다느니 지금 들으면 우습기 짝이 없는 말들을 해 두었다.

여담으로 이 앨범을 발표한지 1년 후 이석원은 '보통의 존재'라는 책을 내며 작가로서 활동도 시작한다.

6집[편집]

5집 2008년 8월 8일 발매, 6집 2017년 6월 1일 발매. 더 할 말이 없다. 1년만 더 뻐겼으면 10년 채웠는데 아쉽다.

당초 6집 '서울의 달', 7집 '쉐쿄바레무뵤바레' 연작 앨범으로 예정 돼 있었으나 나중에 계획을 바꿔 6집을 끝으로 앨범이 더이상 없을 거라는 식으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맨날 라디오나 어디 나오면 '6집 작업 중입니다.'라고 얘기했고 빨리 나올거라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그 소리들 지금 들어보면 진짜 웃기다.

자세한 건 홀로 있는 사람들 참조.

2017년 6월 26일엔 2집의 리마스터링 앨범이 나왔다.

2017년 11월 즈음하여 6집의 한정판 LP 예약을 받고 있다. 활동 쫑냈으면 씨발 죽닥치고 있든가 아님 마지막 공연이라도 한번 하든가 개새끼들아

활동 끝[편집]

소식이 늦었습니다. 어려운 말씀을 드려야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서야 예전에 써 둔 편지를 올립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미안해요.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일을 그만 두길 바래왔어요. 하지만 어딘가에 내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털어놓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 한번만 이번 한장만 하다가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네요. 그간 실천하지 못한 계획들도 있고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서 인사드리고 떠나면 좋겠지만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음악이 일이 되어버린 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항상 벗어나고 싶어했기에 음악을 할때면 늘 나 자신과 팬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습니다.

더이상은 그런 기분으로 무대에 서고 싶지 않음을.. 이렇게밖에 맺음을 할 수 없는 제 사정을..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저는 음악을 그만 두고 더이상 뮤지션으로 살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23년동안 음악을 했던 기억이 모두 다 즐겁고 행복했었다고는 말하지 못해도 여러분에 대한 고마운 기억만은 잊지 않고 간직하겠습니다.

훗날 언젠가 세월이 정말 오래 흘러서 내가 더이상 이 일이 고통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죄를 짓는 기분으로 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다시 찾아 뵐게요.

감사합니다.

23년동안 지지하고 응원해 주신것 잊지 못할 순간들을 만들어 주신것 모두 감사합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2017년 8월 6일 저녁 이석원 올림

음악세계[편집]

단순한 코드 사용, 그 위에 얹어지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노랫말이 일품이다.

이석원의 보컬 또한 일품인데, 언니네이발관의 음악을 '울면서 달리는' 음악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석원의 목소리는 자기연민에 젖은 찌질이의 처절한 자기변론같은 느낌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가창력이 좋은 보컬은 아니라 고음충들에게 까일 여지가 많지만, 이석원은 '자기 음악을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보컬이면 된다'고 일축했다. 슈스케 이런데 나오는 실음과 찌질이들이 이석원보다 실용음악적 관점에서 뛰어난 보컬일 수는 있지만 별 의미는 없다.

보통 1집과 2집, 5집이 띵반취급받는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세 앨범 모두 포합되어있다. 그렇다고 3집 4집 6집이 졸작인건 아니다. 세 앨범 모두 평가가 높고 최소 수작 이상의 취급은 받는다. 게다가 앨범마다 색깔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앨범이 다를 수 있다. 그러니깐 다 들어보라 이말이다~~

디스코그래피[편집]

언니네이발관 디스코그래피
1집 비둘기는 하늘의 쥐 2집 후일담 3집 꿈의 팝송
파일:가장보통의존재.PNG
4집 순간을 믿어요 5집 가장 보통의 존재 6집 홀로 있는 사람들

기타[편집]

(2014년 언니네 이발관 홈페이지에 6집, 7집에 대한 떡밥만 뿌려놓고, 2015년 6월까지 작업 스케치만 올라옴.

2017년 6월 1일 드디어 6집 발매됨! 그런데 마지막 정규앨범이라더니 아예 음악활동을 접을 낌새를 보이고 있어서 다들 개 불안해하는 중. 인밴갤애들 뭐하냐? 수정도 안하고 있었네

  1. http://egloos.zum.com/zakka/v/3220073
  2. 인조 성기를 달고 촬영한
  3.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indieband&no=928232
  4. 당시 그 '우리 애들'이 크라잉넛이었다고.
  5. 정대욱은 대학 가서 다시 합류하지만 리듬파트는 아예 공백이 됐기 때문에 2집 작업을 처음엔 미디로 했다고 한다,
  6.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에 따르면 결혼 생활 당시 개와 고양이를 여러마리 키우느라 돈을 엄청 썼다는 말이 있다.
  7. 이석원이 바로 위에 저 일기 쓰고 곧장 가수 이적에게 달려가서 얘기하고 화해를 했다는 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