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펠린 비행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운용되었던 독일의 군용 비행선이다. 독일의 군인이자 비행선 설계자인 '그라프 체펠린'의 이름에서 따왔다.

전략폭격이라는 개념을 거의 처음으로 구현한 비행선으로 개전 초기에는 무려 37톤의 폭탄으로 수도 런던을 포함한 영국 본토를 폭격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181명이 사망하고 45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영국에서는 민간인들도 공포에 떨었으며 당시 해군 장관이였던 윈스턴 처칠마저도 지리는 등 심리전에서는 특효였다.[1]

하지만 이러한 체펠린의 공포는 어느 순간 깨지게는데 영국의 어떤 전투기 조종사가, 전투기로 비행선 위에 올라가 폭탄을 투하하여 비행선을 공격한다는 장의력돋는 발상을 한것이다. 그러한 발상은 곧 독일 상공에서 실행되었고 결국 비행선 한척이 격추당했다.

이후로도 체펠린은 23차례의 폭격임무를 계속 수행하며 총 125톤의 폭탄을 투하해 사망자 293명, 부상자 691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영국 방공망의 요격기들에 의해 상당수가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때문인지 1917년 이후로는 출격횟수도 11회로 줄어들 정도로 임무 성공률이 더 낮아졌다고 한다. 결국에는 전략폭격의 임무를 폭격기인 고타 G.IV에게 내주게 되는데, 물론 고타 폭격기는 체펠린 비행선에 비해서 작전반경과 폭장량은 상대적으로 부족했지만 대형 비행선들은 그 자체가 건조, 운용, 유지에 있어 부담이 큰 편이었다. 게다가 적의 공격에도 점점더 취약성을 보이게되자 도태되어 퇴역한 것이다.

전쟁 이후로도 체펠린의 이름을 딴 경비행선이 개발되는데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LZ 127와 LZ 130 등이 있으며 이중 LZ 130는 대형참사로 유명한 힌덴부르크호의 기종이다. 결국에 두 기종 모두 운용 가치를 잃게되어 1940년 헤르만 괴링의 지시로 해체된다.

요약하자면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큰 효과가 있었으나 그에 비한 공격 성과는 못낸 군용기로 전후독일에서는 더이상 비행선과 전략폭격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서 2차 대전에서 독일공군은 중폭격기를 거의 보유하지 못했다. 반면에 전략폭격에 심히 지렸던 경험이 있는 영길리는 독일 본토까지 폭격이 가능한 장거리 전략폭격기의 개발에 집중하였고, 훗날 드레스덴 폭격으로 앙갚음을 하게 된다.

관련정보[편집]

파일:독일 제국 국기.png파일:오스만 제국 국기.png 항목이 작성된 1차 세계대전 동맹군(사실상 독일 제국군) 무기 일람
화기류
보병화기 Gew98/MP18
권총 마우저 C96/루거 P-08/보르하르트 C-93
지원화기 MG08/M1918 탕크게베어
육상병기
전차 A7V/Beutepanzer
장갑차 E-V/4 에르하르트
프로토타입 K-wagen/LK 전차/Oberschlesien
공중병기
전투기 포커 아인데커/포커 Dr.1/알바트로스 전투기
폭격기 고타 G.IV/체펠린 비행선
해상병기
전함 나사우급/헬골란트급/카이저급/쾨니히급/바이에른급
잠수함 유보트(U1형~U158형)
참고: 제1차 세계 대전의 협상군 무기
  1. 모르긴 몰라도 당시 영국 국왕도 최소한 한번 이상은 속옷을 갈았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