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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유신 헌법의 전문은 여기에서 읽어볼 수 있다. 개헌 순서상 8차 헌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72년 10월 17일에 등장한 새로운 헌법으로, 이 헌법을 공포한 사건을 '10월 유신' 등으로 칭한다.

제3공화국제4공화국은 이 헌법을 기준으로 구분 짓지만 이 헌법이 나온 시점에서 사실상 공화국이란 명칭은 의미가 없어졌다.

유권자들이 투표하였고 유권자들이 찬성 투표해서 도입된 거니까 정당성이 있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는데, 당시 박정희는 유신 개헌만 하면 마치 통일이 이뤄질 거라는 듯이 선동하고 그 이외의 사회적 논의를 일체 금지했던 탓에 민심이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이 실시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산산조각 났다. 수권법처럼 형식적 법치주의의 문제점을 제대로 드러내는 좋은 예시이다.

마치 마법사에게 지팡이와 책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 박정희를 가장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준 보구라고 할 수 다.

배경[편집]

국외적 배경[편집]

요약하면:

천조국, 소련(+중궈): 우리 데탕트 좀 하겠다는데 니들처럼 쪼그만 새끼들이 깽판 친다 이거지? 뒤지고 싶어?
남북조선: 아니오, 우리도 사이좋게 놀게요(둘 다 속으로 씨발거리며 서로 어떻게 조질까 궁리하고 있음).

사실 조금 더 크게 본다면 당시 세계 상황은 미합중국과 소련이 잠정적으로 평화기를 갖기로 한 데탕트 시기였다. 흐루쇼프는 미국과 공존 공영을 주창하였고 이 당시 흐루쇼프가 ㅄ짓 하다가 잘리고 브레즈네프의 통치 시기였지만 브레즈네프도 딱히 자본주의와 공존 노선을 철폐하진 않았다. 중공도 소련의 위협에 시달리기는 서방과 마찬가지였던 시기였고 미국도 미국대로 이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시원하게 망하고 그 반대급부로 대외 팽창보단 위대한 사회 건설을 부르짖으며 내치에 올인 하고자 하는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 괜히 긴장감 높이면서 돈 날리고 표 잃고 내치에 돌릴 에너지와 역량을 낭비하는 건 싫었다. 그렇다고 소련 견제의 고삐를 느슨하게 할 수는 없으니 이이제이로 중국을 끌어들인 것이 '핑퐁 외교'다. 이때가 그 워터 게이트로 나가리 되기 전의 닉슨 1기 행정부 시대 이야기다. (feat. 키신저)

하여튼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미국이 싸우지 말자고 했는데 당시에는 우리가 필리핀보다 못사는 나라였고 겨우 추월하느냐 마느냐 전전긍긍하던 때였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당연히 한 나라의 국력은 곧 그 나라의 군사력을 의미하는 거니까, 말 안 해도 알겠지? 한마디로 당시 미군이 철수한다고 하면 박정희 정부와 군부의 전원이 부산항에 가서 배째라고 드러눕고 날 밟고 지나가라고 목숨 걸고 주한미군 똥꼬를 빨아줘야 했다. 그만큼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국제 위상, 군사력은 매우 처절하였지만, '저 당시 저 새는 해로운 새다'와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공도 일단은 머릿수와 핵 보유로 군사 강대국에, 김돼지 북한도 한국에게 경제력을 추월당하기 시작했지만 그렇게 뒤쳐지지는 않는 시대였다. 군사력도 당시엔 물량이나 질이나 북한이 남한보다 상대적으로 더 강했고. 공산주의 진영의 '미합중국'을 자처하는 소련이야 뭐...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한가? 즉 당시엔 남한 혼자서 세 나라를 혼자서 상대하라는 건 ㄹㅇ 무장 해제하고 내일부터 적화통일이나 당해서 돼지 노예나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진짜 미국이 아가리 닥치고 저기 벽 보고 서있으라고 말하면 박정희는 벽 보고 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북한 또한 중공과 소련의 지원 없이 남한과 미합중국(feat. 쪽빠리의 딸딸이대)를 혼자서 막을 수 없다. 실제로 사태가 터진 게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었다. 미국이 분노에 날뛰면서 북한 전역에 핵 폭격을 하려고 하자 당시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던 중국과 소련은 오히려 이걸 미국과 화친하는데 이용하려고 니들이 싸지른 거 니들이 알아서 치우라는 자세를 취했고 심지어 그냥 미국 보고 북한을 반으로 쪼개 먹자고 할 정도였다.

그런 전차로 중국도 핑퐁 외교로 미국이랑 평화 무드로 흘러가니 당시 남북 양쪽 모두가 주변국들로부터 화해를 종용받게 되었다. 문제는 이 남북 정권의 정통성이 눈 앞의 적을 상대하고 있는 비상 상황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남북이 7.4 남북 공동 선언을 하고 각자의 정통성이 사라지자 바로 자신들의 정권 강화에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남북은 자기 독재 정권 유지에 전세계의 데탕트 화해 무드까지 이용한 것이다. 남한은 유신 체제의 시작,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 체제(주체사상)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고 이 데탕트 때 소련도 지미 카터를 호구로 봤는지 1979년 아프간을 침공하지만 패배하고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냉전의 긴장의 파고가 짙어졌다.

이면적 배경(실질적 배경)[편집]

당시 국제적 상황은 대한민국이 혈맹을 자처하던 동남아의 공산주의 최전선인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섬나라이지만 상임이사국이었던 중화민국이 퇴출당하면서 오늘날 국가도 아닌 유사국가 신세로 전락한다. 반면 중공이 중화민국을 대체하여 중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물론 당시 미국이 소련 견제를 위해 중공을 밀어준 건 알지? 그런데 그렇게 밀어준 우리 중꿔가 지금 와선 G2를 참칭하며 미국한테 개기고 있다. 이게 새옹지마다.

물론 당시 미국과 중국의 핑퐁 외교는 소련과 중국 사이를 이용한 미국의 외교 전략일 뿐이었다. 한국은 중공과 미수교한 상태였으며 6.25 때 중공의 행패 때문에 영향으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 그렇기에 아무리 중공이 미국과 친하다고 해도 한국에게는 엄연한 적국이었으며 한국에게는 "미국이 소련, 중공과 합의해서 아시아에서 물러나면 어떡하지?"라는 공포심이 생기던 시기였다. 실제로 닉슨은 미군 철수를 계획했다. 당시 아시아에서 한국의 우방국은 중화민국, 베트남 공화국, 필리핀, 일본 정도였는데 중화민국은 UN에서 퇴출당하고 사실상 유사국가가 되어버렸으며 베트남 공화국베트남 전쟁으로 패망했다. 필리핀은 내전이 터져서 지들끼리 싸운다고 정신없었다. 그리고 일본은 전쟁이 금지된 나라이다. 사실상 미국이 빠지면 아시아에서 한국을 소련, 중공으로부터 지켜줄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자강론이 대두되며 미국이 없더라도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했으며 군국주의화가 진행되었다. 한국이 핵무기를 만들려고 했던 시기도 딱 이때였다.

또한 당시 남북 간에 화해 뉘앙스는 국력 차이를 이용한 시간벌이일뿐이었다. 이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해 고기 방패 정도로 생각했기에 지원한 수준은 딱 공산 폭동이 일어나서 망하지만 않을 정도로 간단한 농산품을 나눠주는 수준이었지만 중공소련이 북한에 퍼준 건 동독 수준 이상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만 해도 북한의 국력과 경제력은 한국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 당시 김일성소련중공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경제 지원금들을 경제 발전에 사용할 생각은 안 하고 전부 군사력 증강에 때려 박았고 그 결과 순수 군사력은 북한이 한국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에 비해 당시 한국은 군사적 투자보다는 사회 기반 시설 건설 등 내부 경제 성장에 모든 걸 몰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공백을 남북 화해 분위기를 만들어서 시간 벌 생각이었다. 아마 이게 유신 헌법이 통과하게 만든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이때 김일성 병신이 경제 개발을 1도 안 한 덕분에 북한은 이후 처참한 대가를 치르지만. 쉽게 말해서 남들 심시티 할 때 북괴 혼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던 꼴이다. 무능한 자에게 돈을 투자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국내적 배경[편집]

제3공화국의 마지막 대선인 제7대 대선에서 김머중과 1:1 드림 매치가 성사되었다. 당시 박통은 대선에 나가고자 3선 개헌을 단행했지만 역시 무리수였다. 차기 대통령이 확실했던 김종필를 중심으로 여당 민주공화당 내에서 항명 사태가 터졌고 결국 박통이 이에 열 받아서 중앙정보부를 시켜 김종필을 비롯한 그 계파에게 코렁탕도 선물하고 어르고 달래서 겨우 김종필이 "임자~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은 네가 해~"란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결국 밀어주기로 하여 힘겹게 3선 개헌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3선 개헌에 성공하고 돈을 아주 물 쓰듯이 뿌렸는데도 김머중과 겨우 94만 표 차이로, 박통이 53.2%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국가 예산의 무려 15%를 쓰며(김종필의 증언) 막걸리, 고무신을 돌리고 중정을 이용하고 각종 관제 단체까지 활용하고 지역 감정을 유포했는데 일각에선 이 7대 머선이 영호남 지역감정의 효시라고 볼 정도였다. 물론 김머중이 정계에 뜨기 시작할 때부터 먼저 호남차별론을 꺼내와서 지역 감정을 정치에 이용해서 뜨기 시작한 거라서 지역감정에 대해서 김머중이 억울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만약 공정하게 선거를 치렀다면 100만 표 이상으로 김머중이 이겼을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고 한다.(역시 김종필의 증언)

이에 박통은 엄청난 충격과 당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애송이 뉴비였던 김머중에게 밀렸다는 데에서, 그리고 그렇게 돈을 썼는데 근소하게 이겼다는 데에서 오는 치욕감과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대로 가면 신민당에게 정권 뺏긴다는 위기감도 있었을 것이다.

내용[편집]

박정희가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1972년 당시 중앙정보부이후락이 정권 안정을 위해서 풍년사업이라는 암호명으로 궁정동 안가에서 개정해 만든 헌법. 내용은 대한민국 제4공화국에서 꽤 디테일하게 설명한다.

가장 가관이었던 것은 '긴급조치'였다. 법안을 만들고 그게 통과되려면 국회의 표결과 법원의 심사 등 많은 걸 거쳐야 했지만 긴급조치는 그런 거 단숨에 생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발동된 긴급조치는 9호까지 있었는데, 민청학련 사건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곳에서 투표로 선출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측이 고용한 알바생으로 채워진 곳이었기 때문에 거의 100%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인반신은 이 주작 선거를 통해서 사실상 종신 집권이 가능했다.

어떤 경우와 수단이라도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정치인과 헌법, 국가를 까는 것이 금지되었다. 언론, 음악, 복장 등에 대한 검열은 기본적으로 이뤄졌다. 만약 술에 취한 어떤 사람이 "박정희 그 새끼는 진짜..."라고 푸념이라도 늘어놓는다면 그 사람은 다음 날 실종되면서 동네 개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거였다.

하지만 유신 정권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7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유신 헌법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1년 동안 유지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오른팔이었던 전두환쿠데타에 의해서 부서지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9차 헌법 공포일이 1980년 10월 27일이다.)

여담[편집]

  • 사실 이런 개막장 헌법을 계엄령까지 발동하면서 만든 이상, 박정희 정권은 종말 직전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김재규가 아니었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미 민심은 떠나 있었고 경제는 오일쇼크로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박정희의 집권 명분은 없었다. 일각에서 얘기하는 김재규 아니었으면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해먹었을 것이라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고, 여당 민주공화당 내에서도 유신정우회 때문에 이미 불만이 터질 대로 터져있었기에 아무리 고문하고 입막음을 해도 더 이상의 장기 집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박정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유신 헌법을 선포한 순간부터 박정희 정권 몰락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이 핵무장을 비밀리에 해서 1981년까지 완성한다는 조건인데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비밀리에 핵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된다면 미국을 비롯해서 서방 세계에서도 강력한 규탄과 경제 제재 폭탄을 맞고 북한처럼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도 있었다. 특히 일본은 핵무기를 실제로 맞아본 나라라서 경기를 일으키며 우리나라에게 전면전을 선포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다만,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묵인해준 바 있고, 프랑스의 핵무장을 타협해준 적도 있다. 역사의 IF는 없으므로 만약 핵무장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진 불분명하다.

물론 이후 정권 잡은 전두환이 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에게 정권을 인정받으며 엄청난 혜택을 받아서 경제 호황이 왔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위험천만한 사업은 전두환이 막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