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오스트리아 제국

조무위키

경고! 이 문서에서 다루는 지역이나 국가는 헬보딸입니다!
해당 항목에 서술된 곳은 헬조선보다도 딸리는 디스토피아입니다.
만약 여기로 탈조선하실 생각이라면 포기하십시오. 그냥 이곳에서 계속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찬양하라! 이 문서는 헬조선노오오오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지상 낙원을 다룹니다.
해당 항목에 서술된 곳은 헬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입니다.
만약 탈조선을 하실 것이라면 반드시 노오력을 해서 꼭 이 곳으로 꼭 탈출하십시오. 물론 지구에도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ㄴ 오스트리아 국기 색깔

오스트리아 제국
Kaisertum Osterreich
카이저툼 외스터라이히
기본 정보
수도
국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폴란드,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대륙 유럽
인구 22,000,000(1806)
추가 정보
건국 1804년
언어 공용어 : 독일어
민족 남독일인(수도권)
다민족 국가
종교 카톨릭

소개[편집]

오스트리아 애들이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가짜 제국 놀이를 집어치우고 만든 결과물이다.

제국의 수립[편집]

프랑스에서 일어난 과격한 혁명은 유럽의 왕권정부들을 후덜덜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중부 유럽의 오랜 군주국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덮치는 것을 허용치 않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 이를 저지코자 하였으나 되려 프랑스 혁명군의 기세에 압도되어 이탈리아를 상실하였고 라인 강 서안의 신성로마제국 도시들은 프랑스의 영향권으로 넘어가 버렸다. 제1차, 2차 대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여 지칠대로 지친 연합군은 결국 아미앵 조약으로 프랑스 혁명정부를 인정하는대신 화약을 맺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와의 감정이 좋지 않던 오스트리아는 이와 같은 '바람직한 못한 상황'에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나폴레옹의 칭제에 오스트리아가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러한 양국간 전통적 관계 때문이리라. 코르시카의 촌뜨기가 대관식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프란츠 2세는 '니깟놈이 황제라면 고귀한 합스부르크 군주인 나도 황제다'라는 심리로 스스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 등극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스트리아는 대공국(大公國)에서 제국(帝國)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해체[편집]

이미 영국은 1803년부터 아미앵 조약을 깨고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돌입한 상태였으며, 유럽의 다른 주요 강대국들도 3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한 상태였다.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오스트리아는 세력균형을 위해 참전을 저울질하다 비교적 늦은 1805년에 참전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신성로마의 제국도시인 울름에서 프랑스 제국군과 회전을 벌였으나 물량과 질적 측면에서 게임이 못 되었고 결국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이어 수도인 빈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였고 아우스테를리츠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프랑스군에게 대패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랑스에 항복, 프란츠 황제는 굴욕적인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이 조약에 의해 800년 넘게 유지되어 온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고, 프란츠 1세(신성로마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내려놓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 후 과거 오스트리아의 세력권이었던 독일에는 프랑스의 위성국가인 16개 영방과 라인동맹이 형성되었다.

빈 체제의 성립[편집]

빈 체제 성립의 일등공신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도 1812년부터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는 러시아 원정에서 대규모 병력을 잃었고, 이 틈을 타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동맹을 깨고 프랑스군을 타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12년 오스트리아는 참전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의 양대 잠재적 적성국인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대결을 장기화시키고, 오스트리아가 병력 소모를 딱히 하지 않는 편이 오스트리아에 이득이라는 계산을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을 접견하여 프랑스와 대프랑스 연합군 간 강화를 맺게 하고자 하였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러시아 중 어느 쪽이 더 위협적인가 고려한 끝에 프랑스 봉쇄를 위해 대프랑스 동맹에 다시금 가담하였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연합군의 수뇌부들은 라이헨바흐Reichenbach에서 회합하여 대프랑스 연합을 공고화하였으며, 쇼몽Chaumont에서의 조약을 통해 나폴레옹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끝까지 전쟁을 수행할 것을 확약하였다. 유럽의 국가들은 이 동맹을 단순한 동맹 이상의, 나폴레옹 제국의 팽창으로 인해 확산된 질서와 치안에 악영향을 주는, 자유주의ㆍ민족주의ㆍ평등사상 등을 일소하기 위한 세계 질서 유지동맹으로 여겼다. 연합군의 끈질긴 공격에 의해 프랑스 본토의 방어선마저 붕괴되고 연합군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눈 앞에 두게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별궁에 있었고, 그가 부재한 파리는 나폴레옹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연합군과의 협상에 돌입하였다. 파리 임시정부의 수장인 탈레랑은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였고,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프랑스에 대해 승리를 거둔 연합군은 파리에서의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재침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였고, 이에 대한 봉쇄망을 형성하는데 다시금 합의하였다. 연합국들은 파리 회의의 세부사항들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개최될 회의에서 조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합국은 빈에서 회의를 개최할 것을 합의했을 뿐, 어떤 국가가 참여할 것인지를 정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빈 회의에는 강대국과 군소국가를 가리지 않고 나폴레옹 전쟁과 연관된 대부분의 국가(사실상 유럽의 모든 국가)가 참여함에 따라 전대미문의 대규모 국제회의가 되었다. 빈 회의는 프랑스에의 승전을 계기로 열린 국제회의였으나, 연합국은 프랑스를 강대국 자격으로 빈 회의에 받아들였다. 이는 연합국이 관대해서가 아니라 프랑스를 참여시키는 쪽이 유럽의 안정과 질서에 이익이라는 공통적인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빈 회의에서 연합국들은 영토 재분배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선 프랑스의 국경선은 혁명당시의 그것으로 되돌아갔다. 이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었으며 연합국, 그리고 프랑스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독일영방의 문제는 핫 이슈가 되었다. 메테르니히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독일 영방들이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규합하여 '유럽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이는 프랑스의 팽창을 저지해 줄 방파제로서의 독일이 필요하다고 여긴 영국의 지지를 얻었다. 이로 인해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이 성립되었으며, 오스트리아가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제국은 국제적으로 독일의 대장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빈 체제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본 국가는 북쪽의 프로이센이었다. 빈 회의의 막후 회의인 5대국회의에 참가한 유럽 5대 강국(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중 가장 규모가 작은 국가였던 프로이센은 상기 국가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외교협상을 하여 사실상 강대국임을 공인받았으며, 빈 회의에서 폴란드 서부와 작센 왕국의 북부 영토를 합법적으로 영유하게 되었다. 게다가 지정학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을 받기 쉬운 독일 서부 라인란트에 강력한 국가가 형성되어야 프랑스를 막아낼 수 있다는 다른 연합국들의 계산 아래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라인란트의 영유권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빈 체제의 최대 승리자는 프로이센이었으며, 이는 프로이센과 같은 독일권을 배경으로 하는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러한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독일 연방[편집]

신성로마제국을 대신하여 독일 연방이 독일의 새로운 연맹체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기구를 통하여 오래된 독일에서의 주도권을 다시금 공고화시키고자 하였다. 메테르니히는 이를 위해 독일어권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프로이센의 협력까지도 받아내려고 하였고, 프로이센도 이에 호응하여 연방에 참여하였다. 독일 연방은 34개 독일권 국가들로 구성되었으나 모든 국가가 동일한 수준의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독일 연방은 군사법과 연방 공동법을 제정하였으며, 군사법에 따라 연방 군대도 창설하였다. 연방 군대는 10개 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연방에서 가장 세력이 강력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각기 3개 사단, 바이에른 왕국은 1개 사단, 나머지 국가들이 모두 합해 3개 사단을 구성키로 하였다. 투표권 또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의 양극화는 가속화되었다.

독일 혁명[편집]

베를린의 독일 혁명

1848년 2월에 일어난 프랑스 2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같은 해 3월 독일 전역에서 자유주의ㆍ민족주의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제국을 비롯한 독일 각국은 여전히 근대시민국가와는 거리가 먼 사회였고, 이러한 현실에 반감을 가진 독일의 신흥시민계층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3월에 빈의 시민들은 제국의회에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촉구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청원을 넣었으나 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폭도들이 왕궁으로 난입하여, 메테르니히의 퇴임을 요구하였으며 이는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수상인 메테르니히는 시민계층의 여론을 정치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의 팔라츠키가 요구한 소수민족 권리요구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개혁이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갈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여하튼 그는 시민폭동에 의해 경질되었고, 오스트리아 정부 또한 기존체제만으로는 제국을 통치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헌법을 도입하였다. 이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를 뒤덮은 혁명의 물결은 같은해 여름부터 잠잠해지기 시작하였고, 오스트리아 본토의 혁명요구가 잠잠해 진 틈을 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폭동을 무력진압하였다. 이의 여파로 10월에 빈에서 다시 폭동이 일어났지만 곧 진압되었다. 이러한 자유주의ㆍ사회주의적 혁명의 진압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해 주었다. 또한 수도인 빈의 독일인들은 오스트리아가 제국에서 다른 소수민족들을 상대로 누리는 특권을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독일 혁명은 오스트리아에서 기존체제에 타협적인 개혁으로 이어지는 데 그쳤고, 소수민족들의 저항은 그 이후 계속되었다.

독일 패권대결[편집]

배경[편집]

북부의 프로이센은 초기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뼈아픈 패배 이후, 수구적이지만 효율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프로이센은 1794년부터 대대적으로 농노를 해방시키기 시작하였고, 1811년의 법령을 통해 영주들이 소유한 농토의 1/3을 해방농노들에게 그간의 배상으로 지불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에서 자영농이 증가하였으며, 인구밀도가 낮은 동부 프로이센에서는 상업화된 영농이 확산되어 근대경제의 기반이 되었고 1820-30년대부터는 빠른 속도로 산업화되어 갔다. 1830년에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에서 관세동맹이 창설되었는데, 오스트리아는 여기에서 빠졌다. 이는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영향력 증가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감소를 초래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우위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편집]

1848년에 일어난 독일 혁명에서 베를린 시민들은 빈 시민들과는 달리 프로이센 정부로 하여금 독일 통일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였다. 프로이센 정부는 소요를 막기 위해 이에 응하였으며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소집하였다. 1849년 2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자체적으로 헌법을 채택하고 프로이센 국왕을 독일 황제로 추대하였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빈 체제와 독일 연방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그 결실을 맺지 못하고 해산되었으나 대신 프로이센은 1850년 에어푸르트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오스트리아는 곧바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이에 맞불을 놓았다. 그러던 도중 같은 해 말에 독일 연방의 헤센Hessen에서 사회주의 폭동이 발생하였다. 프로이센은 에어푸르트 동맹군을 이용하여 헤센의 폭동을 진압하고자 했으나, 이와 같은 프로이센의 경찰행위에 오스트리아가 즉각 경고를 보내는 등 강경자세를 취하자 긴장이 흐르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외교적 지원을 받아 프로이센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빈 체제와 독일 연방은 다시 1815년의 상태로 돌아갔으며,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이 다시 부활하였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다시 독일의 주도권을 잡는 것으로 보였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편집]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손을 잡고 함께 덴마크에게 참교육을 시전하였다. 전쟁 후 가슈타인 협정으로 슐레스비히의 영유권은 프로이센이 가져가고, 홀슈타인의 영유권은 오스트리아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의 함정이었고, 오스트리아령 홀슈타인은 프로이센의 영토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슐레스비히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지난 1866년, 프로이센은 또 다시 오스트리아 제국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하였는데, 바로 재상인 비스마르크가 새로운 독일연방국 창설을 제안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북부는 베를린(프로이센), 남부는 뮌헨(바이에른)이 주도권을 가지고 남북독일을 통일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오스트리아를 독일에서 배제하겠다고 밝힌 것이었다. 홀슈타인의 오스트리아 총독은 비상시기가 도래함을 느끼고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프로이센 측이 이를 두고 가슈타인 협정의 위반이라 주장하며 홀슈타인에 군대를 진주시켜 점령해 버렸다. 이로 인해 공식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것은 아니나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의 메이져 신문인 비너 차이퉁Wiener Zeitung에 이례적으로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국민들에게 제국을 신뢰해 달라고 주문했지만 정작 황제 본인부터가 제국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낸 오스트리아 정부는 독일 연방의회에서 프로이센에 대한 제재안을 발효시켰고, 연방의회의 프로이센 대표는 이에 반발하여 퇴장함에 따라 양국간 전쟁이 개시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인구는 프로이센 왕국의 인구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 본토와 이탈리아 북부, 보헤미아 지역을 제외한 동유럽 영토의 대부분이 낙후지역이었으며 그나마 있는 선진지역들도 프로이센에 비하면 산업화가 더딘 지역들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자국의 탁월한 철도망을 이용하여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전장으로 수송하였으나 오스트리아는 수송능력 면에서 프로이센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무기기술과 보급수준도 뒤쳐져 오스트리아군은 전장식 소총으로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프로이센군과 맞서야만 하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군은 다국적 군대로 구성되어 있어서 장교들은 한 가지 명령을 내리기 위해 최소 세 가지 이상의 언어를 써야만 하였으며, 오스트리아 사회의 계급주의가 군대에도 만연해 있어 하급귀족 군인은 평민출신 상관의 명령을 씹고, 상급귀족 군인은 하급귀족출신의 지시를 쌩까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외교적으로도 프로이센은 남유럽의 신흥강국인 이탈리아와 비밀공수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는 남북 양면에서 적을 상대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핸디캡을 가지고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4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손실을 내어 지휘부가 와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항복해야만 하였다. 전쟁은 불과 2달여만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였고, 이탈리아 영토들을 상실하였으며 독일 연방은 해체되었고 빈 체제는 그 종언을 고했다. 이제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제국의 국제적 지위와 위신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와 같은 대외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내부로 눈을 돌렸다.

이중제국 체제로의 이행[편집]

흰색 지역이 헝가리인 다수지역

오스트리아 제국 내부에서 헝가리는 가장 큰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과거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학정을 끝내고 헝가리를 통합하여 자국의 지배하에 두었고 헝가리의 귀족들은 대체로 오스트리아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계는 1784년 계몽군주를 자처하던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18세기 말까지 헝가리의 관용어는 라틴어였다. 헝가리의 귀족들은 라틴어 이외에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구사하였으며 헝가리어는 (백년전쟁 이전 잉글랜드가 그랬듯) 헝가리 사회의 하층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러나 1784년 '계몽군주' 요제프 2세가 계몽국가에서는 사어(死語) 대신 생존해 있는 언어로 다스려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라틴어를 폐기하고 독일어를 관용어의 지위로 격상시킨 사건을 계기로 뿔이 난 헝가리인들은 헝가리어 부흥에 힘쓰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에 대해 적대적으로 돌변하였다. 헝가리 의회는 1792년부터 헝가리 왕국 내의 크로아티아 지방을 제외한 모든 학교에서 헝가리어 교육을 의무화시켰다. 이러한 헝가리어 부흥 노력에 힘입어 1805년부터 헝가리어가 헝가리 의회에서도 통용되기 시작하였으며, 헝가리어로 작성된 청원서는 반드시 헝가리어로 답을 하여야하였다.

이러한 사회전반적인 노력에 힘입어 지성인들도 점차적으로 헝가리어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세체니와 같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헝가리어 및 헝가리 문화육성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는 자들도 등장하게 되었으며 종국적으로 헝가리어는 1836년에는 헝가리 왕국 내에서 공용어로 채택되고 1844년부터 다른 언어들은 공용어에서 배제되었다.

1848년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헝가리 혁명이 진압된 이후, 한바탕 홍역을 치른 합스부르크 정부는 헝가리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헝가리 내에서 독일어 구사자를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하지만 이 정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독일어를 구사하는 공무원이 언어의 장벽으로 인하여 헝가리 왕국령 내에서 세금징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결국 이와 같은 반동주의적인 통제정책으로는 헝가리를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독일에서의 패권경쟁 탈락으로 인하여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강압적인 정책을 밀어붙일 위신과 능력이 더 이상 제국에 있지도 않았다.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1867년 헝가리인들과의 대타협(Ausgleich 아우스글라이히)을 통해 헝가리인들의 자치권을 대폭 보장하는 쪽으로 헝가리 통치정책을 대선회하였으며, 헝가리인들은 제국의원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진보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역대 카이저[편집]

초대 카이저 : 프란츠 1세(Franz I) 1804-1835

2대 카이저 :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 1835-1848

3대 카이저 :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1848-1867

둘러보기[편집]


18세기 19세기 관련 문서 20세기
19th Century / 19世紀 / 1801년~1900년
국가
사건 세계사
한국사
대표 인물 에이브러햄 링컨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나폴레옹 2세 · 루이 18세 · 샤를 10세 · 루이 필리프 · 나폴레옹 3세 · 아돌프 티에르 ·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빌헬름 1세 · 빌헬름 2세 · 주세페 마치니 · 카밀로 벤소 카보우르 · 주세페 가리발디
관련 작품

2015 개정 교육과정 세계사
3단원 IV. 유럽·아메리카 지역의 역사 5단원
고대 및 중세 · 근대
과학 혁명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지동설) · 요하네스 케플러(케플러 법칙) · 갈릴레오 갈릴레이(갈릴레이 위성) · 아이작 뉴턴(만유인력 · 기계론적 우주관) · 윌리엄 하비
근대 철학 및 문화 사회계약설 자연법 · 토마스 홉스(리바이어던) · 존 로크(시민정부론 · 저항권 · 명예혁명) · 장 자크 루소(사회계약론 · 일반 의지 · 프랑스 대혁명)
계몽사상 볼테르 ·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 백과전서(드니 디드로 · 장바티스트 르 롱 달랑베르) · 장 자크 루소
기타 바로크 · 로코코 · 애덤 스미스(국부론)
영국 혁명 청교도 혁명 젠트리 · 청교도 · 스튜어트 왕조 · 왕권신수설 · 제임스 1세 · 찰스 1세(권리청원 · 잉글랜드 내전) · 올리버 크롬웰(잉글랜드 연방 · 호국경 · 항해법 · 아일랜드 원정)
명예혁명 찰스 2세(심사법 · 인신보호법) · 제임스 2세 · 메리 2세 · 윌리엄 3세 · 권리장전 · 입헌군주제 · 앤 여왕 · 대영제국 · 하노버 왕조(조지 1세 · 내각책임제)
미국 혁명 13개 식민지 · 7년 전쟁 · 인지세법 · 보스턴 차 사건 · 제1차 대륙 회의(필라델피아) · 렉싱턴 전투 · 제2차 대륙 회의(조지 워싱턴) · 미국 독립선언서 · 요크타운 전투 · 파리 조약 · 미합중국 헌법(삼권분립) · 미국
프랑스 혁명 앙시앵 레짐 · 계몽사상 · 루이 16세(삼부회) · 국민의회(테니스 코트의 서약 ·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 바렌 배신 사건 · 1791년 헌법) · 입법의회(프랑스 혁명 전쟁 · 상퀼로트) · 프랑스 제1공화국 · 국민공회(자코뱅 · 혁명재판소 · 공안위원회 · 막시밀리앵 프랑수아 마리 이지도르 드 로베스피에르 · 테르미도르의 반동) · 총재정부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나폴레옹 프랑스 은행 · 나폴레옹 법전 · 나폴레옹 전쟁 · 프랑스 제1제국 · 트라팔가르 해전 · 대륙봉쇄령 · 러시아 원정 · 워털루 전투 · 자유주의 · 민족주의
자유주의 빈 체제 vs 자유주의 빈 회의(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 오스트리아 제국 · 대영제국 · 프로이센 왕국 · 러시아 제국 · 프랑스 왕국) · 신성동맹 · 4국 동맹 · 부르셴샤프트 · 그리스 독립 전쟁 · 데카브리스트의 난 · 카르보나리당 · 먼로 독트린
프랑스 부르봉 왕정복고(루이 18세 · 샤를 10세) · 7월 혁명(7월 왕정 · 루이 필리프 · 벨기에) · 2월 혁명(프랑스 제2공화국 · 루이 나폴레옹) · 프랑스 제2제국(나폴레옹 3세 · 보불전쟁) · 프랑스 제3공화국(파리 코뮌)
대영제국 심사법 폐지 · 가톨릭 해방법 · 영국 선거법 개정(부패 선거구) · 차티스트 운동 · 곡물법 폐지 · 항해법 폐지
민족주의 이탈리아 주세페 마치니 · 사르데냐 왕국(카밀로 벤소 카보우르) · 주세페 가리발디 · 이탈리아 왕국 · 베네치아 병합 · 교황령 병합
독일 프로이센 왕국 · 관세 동맹 ·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북독일 연방) · 보불전쟁 · 독일 제국
서부시대 · 남북전쟁(에이브러햄 링컨 · 노예 해방 선언) · 대륙 횡단 철도
러시아 데카브리스트의 난 · 크림 전쟁 · 알렉산드르 2세(농노 해방령) · 브나로드 운동
산업 혁명 매뉴팩처 · 인클로저 운동 · 방직기 · 방적기 · 증기 기관(제임스 와트 · 증기기관차) · 새뮤얼 모스(모스부호) · 자본주의(자본가 · 노동자) · 도시화
산업화의 문제점 및 사회주의 아동 노동 · 러다이트 운동 · 노동조합 · 공상적 사회주의(샤를 푸리에 · 생 시몽 · 로버트 오언) · 과학적 사회주의(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 사회 민주주의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