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정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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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평안도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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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참고: 한국의 행정구역 ·밑줄: 도청소재지

개요[편집]

평안북도 해안지역에 있는 군중 하나.

의사양반, 송성문, 방응모등 나름 난다긴다하는 인물들이 아주 많이 나왔고 본군출신 실향민도 많다보니 이름값이 좀 있던 곳이다.

고안면, 옥천면을 제외하면 거의 전지역이 평야였고 일제강점기부터 간척사업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평북지역에서 상당히 풍요로운 곳으로 유명했지만 북괴치하에서 주체농법인지하는 기괴한 농업정책과 결정적으로 고난의 행군이 겹치면서 좆망해버렸다.

80년대 뽀그리우스가 3대실정으로 대삽질을 하고 있을 때 평원군과 함께 본군의 갯벌을 모두 메워 곡창지대화해서 식량난을 극뿩해보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다행히도 논의만 됬었다고 한다.

읍면[편집]

舊 정주목 지역[편집]

본래 수주(隨州)라 불리는 독립적인 마을이 있었지만 몽골 제국의 침공이후 귀주와 통폐합되어 정원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가 되었다. 이 정원대도호부가 도호부로 강등되고 나중에 정주목이 되었으며 치소가 귀주성에서 마산(馬山)남쪽으로 옮겨졌다. 1455년 폐지한 4군의 주민들을 귀주에 정착시켜 구성군을 분리하고 옛 수천군(隨川郡)으로 치소를 옮긴 뒤 수천군을 없애면서 지금의 정주목이 만들어졌다.

정주읍[편집]

定州邑

면적 16.26㎢. 읍소재지는 성내동.

성내(城內), 서주(西州), 성외(城外), 덕산(德山)의 4개동을 관할했다. 1913년 동부면과 서부면을 합병시켜 만들어졌고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쪽 천검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읍의 진산인 독장산 여맥에 북장대(北將臺)가 솟아있고, 동쪽에는 달천강이 남류한다.

길상산(吉祥山)에서 발원한 그 지류와 석현, 심원산에서 발원한 줄기가 합류하여 황해로 들어간다. 하천변에는 범람원이 발달, 관개에 의한 논농사가 활발하다. 성외동에 이성계최유를 두들겨팬 것을 기념했던 성적비와 북장대 아래 봉명암이 중요 명승고적으로 있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됬는지 아무도 모른다.

1945년 광복으로 읍이 면으로 강등당하면서 남산동(南山洞)이 신설되었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리제를 실시하면서 서주리에서 삼종리(三種里), 남산리에서 남철리(南鐵里), 덕산리에서 동문리(東門里)와 용포리(龍浦里)가 신설되었고 성외리는 고관리(古館里), 서문리(西門里), 북문리(北門里), 성남리(城南里)로, 성내리가 청운리(靑雲里), 중앙리(中央里), 조양리(朝陽里), 남문리(南門里), 오류리(五柳里), 평화리(平和里)로 분리되어

청운, 중앙, 조양, 남문, 오류, 평화, 서주, 삼종, 고관, 서문, 북문, 성남, 덕산, 동문, 용포, 남산, 남철의 17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정주읍(서주리와 삼종리를 제외한 전체)와 서주리(서주리 + 삼종리 + 남서면 동암리 + 산성리)로 개편되었다.

갈산면[편집]

葛山面

면적 48.44㎢. 면소재지는 정양동.

정양(鼎陽), 익성(益城), 광동(光東), 용흥(龍興), 흥록(興麓), 일해(逸海), 서남(瑞南), 애도(艾島)의 8개리를 관할했다.

1913년 갈지면(葛池面), 오산면(五山面), 가산군 군내면의 월경지인 애도리를 편입하여 만들어졌다. 면 북쪽에 자성산(慈聖山, 254m), 정정산(鼎定山, 222m)이 있고 남동쪽에는 검산(劍山,186m)이 있었다. 북동쪽 장포천가에는 넓은 충적지가 있어 그곳에서 논농사가 행해졌다고 한다.

남쪽해안에 애도(艾島), 붕배도(崩盃島)같은 섬들을 관할했는데, 북괴치하에선 간척사업이 이뤄져서 땅이란 연결된듯. 제석사(帝釋寺), 자성사(慈聖寺), 일해정(逸海亭)등이 있었다.

또한 이승훈이 세운 민족학교이자 조만식과 같은 한국 근현대사 네임드들이 교직원으로 일하거나 본학교를 졸업했던 것으로 유명한 오산학교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원건물은 북괴치하에서 정주농업단과대학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해방직후 고읍동(古邑洞)이 신설되었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익성리가 오산리(五山里), 사룡리, 토성리(土城里), 황성리(黃城里)로, 고읍리가 중앙리(中央里), 동북리(東北里), 북오리(北五里)로, 광동리가 송산리(松山里), 송천리(松川里), 남북리(南北里)로, 용흥리가 청룡리(靑龍里), 동서리(東西里)로, 흥록리가 운흥리(雲興里), 대송리(大松里), 서산리(書山里)로, 정양리가 오정리(吳鼎里), 사산리(蛇山里), 마관리(馬館里)로, 서남리가 대전리(大田里), 당촌리(堂村里)로, 애도리가 동부리(東部里), 서부리(西部里)로 분리되었고, 일해리에서 춘천리(春泉里), 해암리(海巖里), 운정리(雲井里)가 신설되어

오정, 사산, 마관, 오산, 사룡, 토성, 황성, 송산, 송천, 남북, 청룡, 동서, 청룡, 동서, 운흥, 대송, 서산, 일해, 춘천, 해암, 운정, 대전, 당촌, 동부, 서부의 25개동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광동리(동북리 + 북오리 + 중앙리 + 송산리 + 송천리), 일해리(사산리 + 해암리 + 운정리 + 춘천리 + 일해리), 애도리(동부리 + 서부리), 세마리(오정리 + 대전리 + 당촌리 +마관리), 흑록리(대송리 + 운흥리 + 서산리), 오산리(청룡리 + 동서리 + 사룡리 + 토성리 + 오산리 + 남북리), 일신리 일부(황성리)로 개편되어 운전군에 편입되었다.

고덕면[편집]

古德面

면적 48.79㎢. 면소재지는 월훈동.

월훈(月暈), 덕원(德元), 관해(觀海), 갈현(葛峴), 일신(日新), 운평(雲坪)의 6개동을 관할했다.

고읍면(古邑面)과 덕암면(德巖面)을 합하여 만들어졌는데, 1931년 고읍면에서 고덕면으로 개명되었다. 면 북쪽의 연향산(延香山, 212m)이 있고 중앙의 천주산(天柱山, 142m)을 제외하면 전지역이 평지였다.

일신동에 이상태를 배향한 신곡사가 있었다.

해방직후 덕암동(德巖洞)이 신설되었고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일신리에서 일향리(日香里), 부산리(婦山里), 신촌리(新村里), 갈현리에서 구린리(龜隣里), 월훈리에서 신시리(新市里), 덕원리에서 과화리(果花里)와 송당리(松堂里), 관해리에서 산서리(山西里), 덕암리에서 관룡리(觀龍里), 운평리에서 운곡리(雲谷里)가 신설되어

월훈, 신시, 덕원, 과화, 송당, 관해, 산서, 갈현, 구린, 일신, 일향, 부산, 신촌, 운평, 운곡, 덕암, 관룡의 17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월현리(갈현리 + 구린리 + 신시리 + 월훈리), 덕원리(과화리 + 덕원리 + 송당리), 일신리(일향리 + 일신리 + 부산리 + 신촌리 + 갈산면 황성리), 관해리(관해리 + 산서리 + 운곡리 + 운평리), 덕암리(덕암리 + 관룡리)로 개편되어 운전군에 편입되었다.

고안면[편집]

高案面

면적 193.04㎢. 면소재지는 소암동.

소암(小巖), 안흥(安興), 송정(松亭), 대양(大陽), 연봉(延鳳), 어호(漁湖), 송포(松浦), 탄우(灘隅), 용포(龍浦), 심천(深川), 봉명(鳳鳴), 독장(獨將)의 12개동을 관할했다.

1931년 고현면(高峴面), 신안면(新安面), 동주면(東州面)의 3개면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면 서쪽 경계에 심원산, 독장산이 있으며, 달천강이 중앙을 남동류하며 넓은 충적지를 만들었다. 이 충적지에서 쌀이 많이 생산된다고 한다.

봉명동에 심원사, 상원암(上院庵), 수도암(修道庵)이 있었고 안흥동에는 무릉탄(武陵灘)과 석수봉(石秀峰), 대양동에 미륵당(彌勒堂), 연봉동에 약수천(藥水泉)등 오만가지 랜드마크들이 존재했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독장리에서 덕답리(德沓里), 문례리(文禮里), 대양리에서 금송리(琴松里), 어호리에서 공산리(孔山里), 송포리에서 미파리(美坡里), 심천리에서 충달리(忠達里), 송정리에서 철원리(鐵院里), 안흥리에서 신풍리(新豊里), 연봉리에서 두봉리, 탄우리에서 흑우리(黑隅里), 용포리에서 용곡리(龍谷里)가 신설되었고 봉명리가 암두리(岩頭里), 오류리(五柳里), 봉산리(鳳山里)로 분리되어

소암, 안흥, 신풍, 송정, 철원, 대양, 금송, 연봉, 두봉, 어호, 공산, 송포, 미파, 탄우, 흑우, 용포, 용곡, 심천, 충달, 암두, 오류, 봉산, 독장, 덕답의 24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대송리(송정리 + 철원리 + 금송리 + 대양리), 용포리(용포리 + 용곡리 + 흑우리), 신안리(안흥리 + 신풍리 + 어호리), 고현리(미파리 + 탄우리 + 송포리 + 공산리), 연봉리(연봉리 + 두봉리), 독장리(문례리 + 덕답리 + 독장리 + 소암리), 암두리(암두리 + 오류리), 봉명리(봉산리 + 심천리 + 충달리)로 개편되어 정주군에 편입되었다.

남서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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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는 몸에 해로운 전화가 없습니다.

南西面

면적 66.34㎢. 면소재지는 남양동.

남양(南陽), 화산(華山), 남호(南湖), 보산(寶山), 상단(上端), 하단(下端), 서호(西湖)의 7개동이 있었다.

1931년 남면(南面), 서면(西面)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전지역은 송왕산등의 270m 주봉을 중심으로 100m내외의 저구릉지로 구성되었으며 평지는 남쪽해안의 간척지와 달천강 연변의 범람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의사양반의 모티프가 된 백인제박사의 고향이다. [1]

보산동에 문곡사(文谷祠)가, 청룡골에는 조헌의 위패를 모신 이택사(麗澤祠), 화산동에 공민왕때 원나라 덕흥군(德興君)을 맞아 진을 친 원수대(元帥臺)가 있었고, 부속도서로 고송과 단층이 절경을 이루며 단 아래의 폭포가 아름다웠던 선도(蟬島)가 있었다고 한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하단리가 삼산리(三山里), 연동리(蓮洞里), 구룡리(九龍里)로, 서호리가 월암리(月岩里), 구향리(九鄕里), 동서리(東西里), 서암리(西岩里), 서포리(西浦里)로, 화산리가 구포리(龜浦里), 산하리(山下里), 월양리(月陽里)로, 남양리가 조양리(朝陽里), 영외리(嶺外里), 부호리(鳧湖里), 풍암리(豊岩里)로 분리되었고 상단리에서 가태리(加胎里), 동암리(東巖里), 산성리(山城里)가, 남호리에서 대호리(大湖里), 보산리에서 황맹리(黃孟里), 염내리(廉內里), 마포리(馬浦里)가 신설되어

조양, 영외, 부호, 풍암, 구포, 산하, 월양, 남호, 대호, 보산, 황맹, 염내, 마포, 상단, 가태, 동암, 산성, 삼산, 연동, 구룡, 월암, 구향, 동서, 서암, 서포의 24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상단리(가태리 + 구룡리 + 연동리 + 삼산리 + 상단리), 남양리(조양리 + 영외리 + 부호리), 남호리(남호리 + 대호리 + 풍암리), 보산리(보산리 + 황맹리 + 염내리 + 마포리), 서호리(월암리 + 동서리 + 구향리 + 서암리), 월양리(월양리 + 구포리 + 산하리)로 개편되어 정주군에 편입되었고 서포리는 곽산군 원포리에 통폐합되었다.

대전면[편집]

大田面

면적 32.82㎢. 면소재지는 운전동.

운전(雲田), 운학(雲鶴), 운흥(雲興), 강서(江西), 대흥(大興), 운산(雲山)의 6개동을 관할했다.

1913년 운전면(雲田面)과 대명면(大明面)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중앙부는 평지지만 북쪽은 천려산(天麗山, 259m), 칠악산등이 솟아있었으며 평지지역은 청천강이 남쪽을 연해 흐르는데다 1924년 동인수리조합몽리구역으로 지정되 개간된 덕에 광복이전 평안북도의 주요 곡창지대로 떡상했다.

러일전쟁시기 좆본군이 상륙했던 하일포(河日浦)가 본면에 있었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운전리에서 운북리(雲北里), 운흥리에서 현산리(峴山里), 삼오리(三鰲里), 미륵리(彌勒里)가, 운학리에서 소교리(小橋里), 강서리에서 하일리(河日里)가 신설되어 운전, 운북, 운학, 소교, 운흥, 현산, 삼오, 미륵, 강서, 하일, 대흥, 운산의 13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대오리(현삼리 + 삼오리 + 미륵리 + 대흥리), 운하리(하일리 + 강서리 + 운학리 + 운산리 + 소교리)로 개편되어 전역이 운전군에 편입되었다.

덕언면[편집]

德彦面

면적 82.28㎢. 면소재지는 대성동.

대성(大成), 원봉(圓峰), 덕성(德星), 육성(六星), 석산(石山), 대산(大山), 신창(新倉), 증봉(甑峰), 방천(防川), 침향(沈香)의 10개동을 관할했다.

1931년 덕달면(德達面), 이언면(伊彦面), 아이포면(阿耳浦面)의 3개면을 병합하여 만들어졌다. 북쪽의 묘두산, 남쪽 해안가의 증봉산(甑峰山, 162m), 동쪽에 제석산이 있었는데 서쪽 남서면과의 경계지역에서 남류하는 달천강유역에 평야가 형성되었다.

덕성동에는 매우 큰 호수인 덕성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충의단, 옛 장성, 망해정(望海亭), 봉수산(烽燧山)등의 고적이 있었다.

해방직후 덕흥리(德興里)가 신설되었고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에 원봉리에서 강서리(江西里), 덕성리에서 영암리(嶺巖里), 육성리에서 오봉리(五峯里), 석산리에서 강북리(江北里)와 남양리(南陽里), 대산리에서 모안리(慕顔里)와 당산리(堂山里), 신창리에서 천산리(天山里), 증봉리에서 구주리(龜洲里), 대성리에서 남신리(南新里), 침향리에서 운향리(雲香里)와 대향리(大香里)가 신설되었고 덕흥리가 덕산리(德山里), 상사리(上四里)로 분리되면서 대성, 남신, 원봉, 강서, 덕성, 영암, 육성, 오봉, 석산, 강북, 남양, 대산, 모안, 당산, 신창, 천산, 증봉, 구주, 방천, 침향, 운향, 대향, 덕산, 상사의 24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신천리(남신리 + 대성리 + 방천리), 원봉리(덕산리 + 상사리 + 원봉리 + 강서리), 침향리(운향리 + 침향리 + 대향리), 신봉리(구주리 + 신창리 + 증봉리), 대산리(모안리 + 당산리 + 대산리 + 천산리), 석산리(남양리 + 강북리 + 석산리), 오성리(육성리 + 덕성리 + 오봉리 + 영암리)로 개편되어 전지역이 정주군으로 개편되었다.

마산면[편집]

馬山面

면적 64.39㎢. 면소재지는 청정동.

청정(淸亭), 동창(東倉), 원서(院西), 원동(院東), 옥야(玉野), 춘산(春山), 신오(新五)의 7개동을 관할했다.

1913년 마산면, 서원면(西院面)의 일부를 합하여 만들어졌다. 남쪽 대전면과의 경계지에 천려산이 있고 중앙 남쪽에 용장산(龍藏山, 300m)이 있어 면대부분이 험한 산악지대였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청정리에서 청남리(淸南里), 춘산리에서 두무리와 청산리(淸山里), 신오리에서 경안리(敬安里), 동창리에서 봉화리(烽火里), 원서리에서 용진리(龍進里), 원동리에서 냉정리(冷井里), 옥야리에서 대성리(大城里), 수문리(水門里)가 신설되어 청정, 청남, 동창, 봉화, 원서, 용진, 원동, 냉정, 옥야, 대성, 수문, 춘산, 두무, 청산, 신오, 경안의 16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원서리(원서리 + 용진리 + 냉정리), 청정리(청정리 + 두무리 + 청남리 + 청산리 + 춘산리), 동창리(봉화리 + 동창리), 신오리(경안리 + 신오리), 옥야리(대성리 + 수문리 + 옥야리 + 원동리)로 개편되어 전지역이 운전군에 편입되었다.

舊 곽산군 지역[편집]

본래 장리현(長利縣)이었는데 발해멸망이후 여진족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희가 상납받은 뒤 그지역에 정착했던 여진족을 쫓아내고 황폐화된 지역을 개척하여 강동 6주중 하나인 곽주(郭州)가 설치되었고 1018년 방어사가 파견되었다. 1221년 반란이 일어나 정양현(定襄縣)으로 강등먹었고 1231년 몽골군의 침공을 받아 섬으로 치소가 옮겨졌다. 1260년 본토를 수복하면서 치소가 원래위치로 옮겨졌으며 수주(隨州)의 속주가 되었다. 1371년 드디어, 군으로 부활해서 1413년 주이름을 갈아치우면서 곽산군이 되었다.

곽산면[편집]

郭山面

면적 16.82㎢. 면소재지는 염호동.

염호(鹽湖), 남단(南端), 조산(造山), 석(石)의 4개동을 관할했다.

곽산군의 중심지였다. 1913년 곽산군이 정주군에 통폐합될 때 곽산군 군내면에서 곽산면으로 개명되었다.

면 중앙부에 조산(造山, 128m), 남부에 남산(南山, 122m)이라는 동네 언덕만한 좆만한 산들이 있었고 나머지는 100m내외의 구릉지대였다. 서쪽 주송강(酒松江)변에 소규모의 충적평야가 만들어졌고, 여기서 논농사가 행해졌다.

염호동에는 조선의 서북지역 핵심 방어지역이었던 능한산성이 있는데, 북괴치하에서도 보호되고있다. 남다동과 염호동 경계 투구봉에 봉수대가 있고 능한산에는 용연(龍淵), 자운사가 있었다.

북괴 수립직후인 1949년 남단리에서 남산리(南山里), 남천리(南川里)가 신설되었고 조산리가 청룡리(靑龍里), 유동리(柳洞里), 중앙리(中央里)로, 석리가 석동리(石洞里), 중단리(中端里), 해룡리(海龍里)로, 염호리가 충리(忠里), 염창리(鹽倉里), 신생리(新生里), 도창리(都倉里)로 분리되어 충, 염창, 신생, 도창, 남단, 남산, 남천, 청룡, 유동, 중앙, 석동, 중단, 해룡의 13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곽산읍(중앙리 + 유동리 + 충리 + 신생리 + 도창리), 남단리(남산리 + 남단리 + 남천리 + 염창리), 석동리(석동리 + 중단리 + 해룡리 + 청룡리)로 개편되었다.

관주면[편집]

觀舟面

면적 32.95㎢. 면소재지는 초장동.

초장(草庄), 근담(近潭), 주학(舟鶴), 관삽(觀揷)의 4개동을 관할했다.

1913년 곽산군 우면(亏面), 관면(館面)이 합병되면서 만들어졌다. 중앙의 통경산(通景山, 217m)을 빼면 전지역이 200m미만의 저구릉지이며, 관삽동지역에는 넓은 간척평야가 분포했다. 이 간척평야에서 쌀, 조, 수수, 콩등의 곡물이 생산되었고 해안지방에서 조개, 낙지, 망둥이등이 잡히는등 물산이 풍부했지만 북괴치하에선 공산화로 뭐다 좆투더망.

관삽동의 해변지역은 물고기 비늘처럼 생긴 병풍바위들이 늘어선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관삽리가 관상(觀上里), 관하리(觀下里), 강안리(江岸里)로 분리되고 초장리에서 중앙리(中央里)가 신설되면서 초장, 중앙, 근담, 주학, 관상, 관하, 강안의 7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관상리(관상리 + 강안리 + 관하리), 초장리(초장리 + 중앙리), 통경리(근담리 + 주학리)로 개편되었다.

안흥면[편집]

安興面

면적 32.90㎢. 면소재지는 안의동.

안의(安義), 호현(好峴), 암죽(巖竹), 임암(林巖), 삼단(三端)의 5개동을 관할했다. 1913년 곽산군 남면, 서면을 합하면서 만들어졌다. 서쪽에는 청암산(靑巖山, 184m)이 있고 선천군과 경계를 이루며 남서류, 황해로 들어가는 동래강이 있었다. 이중 동래강유역과 안의동지역에 넓은 평야가 만들어졌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안의리가 의봉리(義峯里), 공천리(公川里), 삼흥리(三興里)로, 삼단리가 입석리(立石里), 사동리(砂洞里), 고잔리(古棧里), 암죽리가 토교리(土橋里), 관죽리(觀竹里), 호현리가 장암리(章巖里), 직현리(稷峴里), 고령리(古靈里)로 분리되면서 의봉, 공천, 삼흥, 장암, 직현, 고령, 토교, 관죽, 임암, 입석, 사동, 고잔의 12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고현리(직현리 + 고령리), 삼단리(사동리 + 입석리 + 고잔리), 안의리(공천리 + 의봉리 + 삼흥리), 암죽리(입암리 + 관죽리 + 토교리), 문장리(장암리 + 옥천면 문인리)로 개편되어 곽산군에 편입되었다.

옥천면[편집]

玉泉面

면적 128.23㎢. 면소재지는 문인동.

문인(文仁), 군산(君山), 월옥(月玉), 상단(上端), 당하(堂下)의 5개동을 관할했다.

1913년 곽산군 북면에서 정주군 옥천면으로 개명되었다. 남서쪽에 검무산(劍舞山, 288m), 중앙 남부에 지령산(地靈山, 415m)이 있었고 다른지역은 300m 내외의 구릉지로 구성되었다. 서쪽 동래강연변의 소규모 충적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밭농사로 먹고살았다.

상단동에 발해때 창건된 사찰인 개원사(開元寺)가 있었는데 용케도 6.25 도서정리사업 고난의행군때 살아남았다.

서쪽 월출암과 동쪽에 장경사의 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해방직후 장룡동(長龍洞)이 신설되었고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문인리에서 수두리(水頭里), 장룡리에서 용두리(龍頭里), 군산리에서 산단리(山端里), 월옥리에서 소천리(小川里), 약수리에서 감당리(甘棠里), 당하리에서 지령리(地靈里)가 신설되었고 상단리가 세마리(洗馬里), 사자리(子里), 장경리(長景里)로 분리되면서 문인, 수두, 군산, 산단, 월옥, 소천, 세마, 사자, 장경, 당하, 지령, 장룡, 용두의 16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문장리 일부(문인리), 군산리(군산리 + 감당리 + 산단리), 당상리(당하리 + 지령리 + 세마리 + 사자리 + 장경리), 월옥리(월옥리 + 소천리), 장룡리(수두리 + 융두리 + 장룡리)로 개편되어 전지역이 곽산군으로 편입되었고 약수리는 구성군 이현면 하단리, 약수리와 함께 약수리로 개편되어 선천군으로 편입되었다.

임포면[편집]

臨浦面

면적 64.45㎢. 면소재지는 원단동.

원단(元端), 염호(濂湖), 원포(遠浦), 천태(天台), 장도(獐島), 고성(古盛), 동로(東路), 원하(元下)의 8개동을 관할했다.

1931년 임해면(臨海面)과 해산면(海山面)이 합병되면서 만들어졌다. 남동쪽 반도끝에 천태산, 범우산이 있었고 서쪽 면계에선 사송강이 남류해 황해로 들어갔다.

북괴수립직후인 1949년 원하리에서 동흥리(東興里)가 신설되고 원단리가 상단리(上端里), 송암리(松巖里), 하단리(下端里), 염호리가 창송리(蒼松里), 동양리(東陽里), 원포리가 신성리(新城里), 용상리(龍上里), 해성리(海城里), 천태리가 안봉리(安峯里), 한마리(漢馬里), 소록리(笑祿里)로 분리되어 상단, 송암, 하단, 창송, 동양, 신성, 용상, 해성, 안봉, 한마, 소록, 장도, 고성, 동로, 원하, 동흥의 16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인해 염호리(동양리 + 고성리), 노하리(원하리 + 동흥리 + 동로리), 원하리(상단리 + 하단리 + 창송리 + 송암리), 원포리(용상리 + 해성리 + 신성리 + 남서면 서포리), 천대리(한마리 + 소록리 + 장도리 + 안봉리)로 개편되어 전지역이 곽산군으로 편입되었다.

아웃풋[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