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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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th Century / 6世紀 / 501년~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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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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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작품

2015 개정 교육과정 세계사
3단원 IV. 유럽·아메리카 지역의 역사 5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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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황제.

보통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고 불린다.

유~청년기[편집]

마케도니아 촌구석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밭이나 갈면서 살아가다가. 같이 밭갈던하던 삼촌이 입신양명의 꿈을 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인생은 변화하게된다. 수도로 간 삼촌 유스틴(Iustin)은 문맹에 교육의 ㄱ자도 못본 사람이라 그렇지 사람이 호탕하고 체격이 늠름해 금세 전쟁에서 공을 세워 졸병에서 황제 근위대로 승진했고, 이렇게 수도에서 어느정도 입지를 굳힌 유스틴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 고향에서 농사나하던 유스티니아누스를 불러 가르치고 입히고 먹이며 친 아들처럼 길렀다.

시간이 흘러 유스틴은 어느새 근위대장이 되어있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유스티니아누스로 개명한다(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유스티니아누스란 이름은 개명한 이름이고 전 이름은 플라비우스 사바티우스) 한편 유스틴은 섬기던 황제가 후사를 정하지 못한채 병사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수도의 귀족들은 당연하게도 유력한 황제 후보인 유스틴에게 뇌물 공세를해댔고,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유스틴에게 받은 뇌물을 시민들에게 베풀라 조언했다.

그랬더니 유스틴은 단지 귀족들만의 지지가 아닌 시민들의 지지도 얻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전임 황제의 조카들과 군대의 지지인데 이 또한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언이 큰 역할을 한다. 일단 유스티니아누스는 명망이 높은 장군을 수도로 불러들여 포섭을 시도했고(그러나 장군의 명망이 너무 컸기에 포섭을 시도하다 결국 암살해버린다.) 전임 황제에게 미움을 사 작위가 박탈되거나 투옥된 군인들을 사면하고 고용해 유스틴의 친위 세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때 즈음에 테오도라와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하려다 독실한 신자이던 형수에게 빠꾸먹고 잠시 헤어진 척 코스프레했다.

그 후로 그냥저냥하게 시간이 흐르던 중 테오도라를 빠꾸먹였던 형수가 죽고 얼마 뒤 유스틴도 사망하자 그 후계로서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한다(그리고 즉위하자마자 법을 고쳐 테오도라와 결혼한다.) 즉위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 각지에서 명망 높은 인사, 능력있는 인물들을 등용해 제국 개혁에 나선다.

테오도라에 대해 잠깐 얘기하자면, 창녀 출신이다. 스트립쇼나 해대던 비천한 여자였는데 창녀 치곤 빡머가리가 아니었는지 존나 똑똑했다고 한다. 와꾸도 어느정도 먹히고 머리고 좋은 테오도라를 유스티니아누스는 창녀였지만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에게 "삼촌 천민하고 귀족하고 결혼할 수 있게 법좀 고쳐주세요"라고 했다가 유스티누스가 "만날 여자가 없어서 창녀나 만나냐 개새끼야" 이럴 정도로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은 유스티니아누스는 즉위하자마자 법을 고치고 테오도라랑 결혼했다고 한다. 이것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신의 한수가 되어서 테오도라는 결혼 후에는 정숙하게 살았고(다만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는 그런 '척'만 했다는 설이 있다.) 거의 공동 통치자급으로 군림했다. 그대신 유스티니아누스가 공처가가 됐다더라.

제위에 오르다[편집]

유스티니아누스의 개혁[편집]

먼저 제국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재정 개혁에 나선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카파도키아의 요한이라 불리는 인물을 발탁한다. 요한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 즉시 개혁에 나서 부패 관료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세금 징수를 지방 총독, 관리가 징수함이 아닌 중앙 정부의 공식 징수원이 징수케 만들어 중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짬처리를 원천 배제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금을 낼 능력이 있음에도 세금을 안내려하거나 혹은 그렇게 보이는 인물에게 고문을 허용하는 법안을 상정해 매우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했고 이 개혁을 단행해 얻은 막대한 재정은 훗날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사업의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카파도키아의 요한은 능력 자체는 로마사에 길이남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천성이 잔혹하고 탐욕스러워 그 본인이 막대한 부패를 저지르고 노예를 막대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하지만 그럼에도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상납하는것을 잊지 않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요한의 막대한 부패를 감당하고서도 남을 정도로 세수가 막대했기에 별다른 간섭이나 처벌은 업었다.)

그리고 자타공인 유스티니아누스 최대의 업적이라 칭송받는 로마대법전을 위시한 사법 개혁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트리보니안(Tribonian)을 등용해 당시 통일된 법전이 없어 돈만 내면 무조건 무죄방면되던 로마 법체계를 완전히 뜯어고친다. 트리보니아는 대략 1년 조금 넘는 시간만에 기존의 법과 전례를 모조리 집대성하는 법전의 기초를 만들었고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이 가세해 로마대법전을 제작한다. 이후 트리보니안은 법전 제작하던 중 겸사겸사 변호사들을 위해 조언 및 기존의 판례등과 기타 등등을 집대성한 코르푸스 주리스 시빌리스(Corpus Juris Civilis)를 집필하고 이것이 훗날 민법의 시초가된다.

그러나 트리보니안은 요한을 뛰어넘는 개막장이였는데 첫째는 그가 이교도였으며 둘째는 부패했고 셋째는 심각할정도로 부패했다는 것이다. 트리보니안은 겉으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청렴한 법학가였으나 그 실체는 남한테 돈 받고 법전을 수정해주는 막장 행각을 저지르고, 웬만하면 자기 측근들의 부패나 스캔들을 봐주던 유스티니아누스도 질려할 정도로 정체 불명의 이교도 혹은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있었다.

니카의 반란과 하기아 소피아 건설[편집]

이리저리 내정에 안정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제 외부로의 확장을 목표로 하려고하는데 이젠 '니카의 반란'이 터진다. 자세한 전후사건은 생략하고 기본만 설명하면 이렇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선 전차시합이 유행했는데 대표 팀이 녹색파와 청색파가 있었다. 각각 한명씩 이 두 팀의 기수가 유죄 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을 받아야하는데, 어찌저찌 구사일생했고 또 마침 그 사형장에있던 사제들이 이 두 기수를 구해 교회로 데려가고 이에 당연하게도 군대가 나서서 교회를 포위하자(교회는 성전이라 무기 가지고 못 들어가고 폭력 쓰면 안된다) 이에 두 팀이 황제한테 두 기수를 사면해달라 요청한다.

당연하게도 황제는 이딴 개소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기에 무시했고, 이렇게되자 두 팀이 폭동을 일으켜 황제를 죽이려 시도하고(실패한다) 도시를 박살내기 시작한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깜짝 놀라 요구를 들어줄 터이니 진정하라 했으나 이젠 음식 나중엔 새 황제를 요구하며 폭동은 더욱더 거세져갔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는 재화와 몇몇 측극들을 대동해 도주하고 멘탈이 박살났는지 퇴위까지 진지하게 논의하나가 테오도라의 '왕좌에 앉아 죽는게 평민으로 사는것보다 낫다' 라는 말에 멘탈을 추스르고 폭도들을 진압하기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우선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장군들)에게 명을 내려 군사를 소집하고 최측근이자 환관인 나르세스에게 꿍쳐온 돈을 청색파에게 먹여 녹색파와 분열을 일으키도록 한다. 본디 청색파였고 청색파의 안배를 여러차례 봐주었지 않냐며 또 옹립된 황제는 녹색파라며 이간질 시켜 청색파의 일부를 해산시킨다. 이후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에게 옹립 황제를 납치해오라 명했지만 경비가 너무 삼엄하여 실패하고 결국 군대를 동원한 진압에 나서고 하룻밤 동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결국 폭도들은 약 3만의 사상자를 내며 대패하고 뿔뿔이 흩어지며 니카의 반란은 끝을 맞이한다.

반란의 종결 직후 유스티니아누스는 폭동으로인해 손상된 도시의 재건에 나섰고, 폭동으로인해 파괴된 기존의 대성당을 개축하여 현재의 이스탄불 하면 생각하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건설케한다. 이렇게 반란 문제도 어찌저찌 수습한 유스티니아누스는 과거 로마 약탈의 복수를 명분으로 전 로마령 북아프리카에 세워진 반달 왕국의 재정복을 계획하나 때마침 반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이가 동로마식 기독교를 신봉하고 친 로마적 인사라 흐지부지된다.

북아프리카 재정복[편집]

그러나 553년 반달 왕의 조카이자 독실한 아리우스파 기독교의 신봉자이던 겔리메르가 쿠데타를 벌여 왕을 쫓아내고 본인이 반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다. 이에 한창 명분을 찾던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즉시 폐위된 왕의 복위를 명분으로 벨리사리우스에게 1만 6천의 육군과 600척의 군함을 붙여 반달 왕국을 정복하러 보낸다(사전에 왕을 복위시키라 외교적으로 요구했지만 당연히 거부 당했다.) 또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은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반달 왕국 내에 반란을 일으켜 반달군과 해군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 벨리사리우스의 군이 아무런 저항 없이 북아프리카에 상륙케한다.

이후엔 벨리사리우스의 뛰어난 군재와 통찰력과 약간의 운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본토에 남은 반달군을 격파하고 겔리메르의 형제들을 모조리 참살했으며 겔리메르 본인은 포로로 잡힌다. 결국 북아프리카에 다시 한번 로마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게 만드는데에 성공하며, 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의 공을 치하하고 반달족의 수도에서의 승전식을 거행함을 허가한다(아우구스투스 이후로는 오직 황제나 황제의 혈연만이 승전식을 거행함이 가능했다.)

이탈리아 원정[편집]

북아프리카를 수복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탈리아 반도 재정복을 준비하였는데, 때마침 동고트 왕국의 아말라순타라는 친로마파 여왕이 군림하고있었고, 자신의 아들을 로마인처럼 키우는 등(프로코피우스나 당대 야사에셔는 유스티니아누스와 아말라순타가 그렇고 그런 사이여서 그렇다는 말이 있다.) 굳이 친하게 지내자는 나라 쳐들어갈 명분도 없고, 필요도 없어서 이탈리아 방면은 잠시 접어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않아서 아말라순타 여왕과 여왕의 아들이 반로마파인 조카에게 살해당한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땡잡았다하는 기분으로 재정복을 다시 추진한다. 이번에도 원정군의 사령관은 벨리사리우스였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모종의 위협감을 느꼈는지 북아프리카 재정복 당시 동원된 1만 6천의 절반도 안되는 7천 5백의 군대로 이탈리아를 재정복하라고 명령한다. 사실상 벨리사리우스에게 죽으러가라는 수준이였는데 놀랍게도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 남부 장악에 성공하고 전초기지를 세운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즉각 증원군을 보내 동고트 왕국의 북동쪽을 치고 동시에 갈리아(현 프랑스 권역)의 프랑크 왕국에 돈을 먹여 동고트 왕국의 북서쪽을 치게한다. 그러자 동고트는 사신을 보내 '아이고 황제폐하 자비점..' 하는 등 사실상 항복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나...

동고트군이 기적적으로 증원군 분쇄하고 프랑크족을 몰아냈으며, 더욱이 정복한 북아프리카 방면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탈리아 전선이 고착화되어버렸고 북아프리카는 다시 야만인들의 손에 들어가기 일보직전인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당시 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원정은 취소되는 분취기였으나.. 자신감이 급충전된 동고트 국왕이 로마의 사절을 잡아쳐넣는 등 도발을 감행하자 이에 분노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다 좆까고 이탈리아 먼저 족친다'는 결정을 내리게한다. 이에 벨리사리우스는 명을 받들어 북진을 감행하고 로마 바로 밑에 위치한 네아폴리스 시를 함락시킨다.

네아폴리스를 함락시킨 벨리사리우스가 로마 함락을 위한 행군을 준비하던 도중 동고트 왕국 내에서는 현임 왕의(아말라순타를 죽인 조카) 무능으로인해 이런 일이 벌어진것이라며 귀족들이 모의해 부르군트 왕국의 왕 비티게스를 왕으로 옹립한다. 그러던 말던 벨리사리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행군했고 때마침 로마 주교(훗날 교황)의 지지로 손쉽게 로마를 손에 넣는데에 성공한다. 직후 비티게스와 그의 군대는 벨리사리우스를 몰아내기위해 남쪽으로 행군을 개시했고 벨리사리우스는 압도적인 적에 맞서는 것보다는 로마시를 방어거점으로 삼고 버티기를 선택했고 또다시 벌어진 치열한 전투끝에 간신히 로마를 사수해냈고, 이후 연달아 벌어진 수차례의 전투 끝에 끝끝내 비티게스의 군세를 역으로 박살내면서 로마의 사수를 성공해낸다.

그리고 때마침 유스티니아누스가 보낸 2차 증원군이이 도착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2차 증원군은 기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예군이였는데 각각 2부대로 나뉘어져 하나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최측근 환관 나르세스의 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최근에 장군으로 승진한 젊은 요한이라는 장군이였다. 벨리사리우스는 나르세스의 부대는 그대로 본대에 합류하고 요한이 이끄는 기병대는 북쪽을 향해 남은 동고트군을 가능한한 무자비하게 박살낼것을 명했다(그리고 후미를 잡혀 포위 당할것을 우려해 결코 적을 뒤에 남겨둔채 전진치 말라는 경고도 했다.)

요한의 기병대는 쾌속 전진을 감행하며 악시무스라는 잘 요새화된 도시에 당도하는데 악시무스의 방비가 철저했고, 요한이 이끄는 기병대는 공성전에 불리하기에 벨리사리우스의 조언겸 명령을 어기고 악시무스 무시한채 진격한다. 또 한참 가다가 우르비누스라는 요새도 마찬가지로 무시하고 진군한다. 그렇게 진군한 요한의 군대는 아리미니움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는데 아리미니움은 이미 그곳에 살던 로마 시민들의 반란으로 동고트군이 떠난지 꽤 된 도시라서 요한의 군대는 환대 받으며 도시로 입성하였다.

또한 아리미니움은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어 이곳을 점거시 라벤나 공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요한이 무시하고 지나온 두 도시의 존재로인해 사실상 고립된 아리미니움은 전략, 전술적 가치를 상실한지 오래라 요한의 아리미니움 점령 소식을 들은 벨리사리우스는 즉각 철퇴할것을 명한다.

그러나 요한은 벨리사리우스의 명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아리미니움을 사수하려하였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의 생각대로 얼마 안 가 아리미니움은 동고트군에의해 포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벨리사리우스는 요한의 부대를 구원키위해 전군을 꼬라박는 위험을 감수 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부대를 이끌고 천천히 도시들을 하나 하나 공략하면서 북상한다는 작전을 수립하고 이에 대부분의 장군들의 동의를 받는다.

그러나 이 작전에 나르세스는 즉각적이고 격렬하게 반대한다(나르세스와 요한이 개인적,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것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르세스는 대략 '우리가 수가 많나? 아니지 그리고 요한이 이끄는 부대는 정예 기병 부대인데 이걸 안 구한다고? 님 대갈빡 수준이?' 라면서 벨리사리우스의 작전을 맹비난했고 이 직후 요한 부대의 전령이 아리미니움의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에대해 말하면서 나르세스의 '요한 부대를 구원해아한다!'라는 안에 무게가 실린다.

결국 벨리사리우스는 나르세스의 안을 받아들여 요한 부대를 구원키위해 병력을 북상시킨다. 먼저 벨리사리우스는 군을 세개로 나뉘어 하나는 해로로 하나는 해안가로 나머지는 산을 타 아리미니움으로 향하하게한다. 해안가로 향한 부대는 조용히 이동하며 적의 도시가 보이면 밤에 도시 근처에 대규모로 불을 질러 대규모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한것처럼 적들을 속였고, 그러던 사이 나머지 두 부대는 아리미니움을 향해 맹렬히 진군하고 있었다.

먼저 해로를 향해 오던 부대가 아리미니움에 나타나자 남쪽의 대군에대한 소문을 들은 동고트군은 예상치 못한 로마군의 함대가 보이자마자 바로 도망치기에 여념이 없었고, 이때 요한군이 추격을 해 동고트군을 분쇄하는대에 성공했다면 이탈리아 정복은 매우 수월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요한군은 오랜 포위로인해 굶어죽기 직전의 상황에 몰려 적을 추격할 여력이 없었고 로마군은 매우 크나큰 기회를 놓치게 된다.

어찌되엇건 본대와 요한의 부대는 합류하게 되었고 이제 차근차근 이탈리아를 정복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였지만 여기서 또 일이 꼬이고 만다. 구출된 요한이 벨리사리우스보다 먼저 자신을 구원하자는 안을 낸 나르세스에게 먼저 감사를 표하자 본인에게 먼저 감사를 표함이 맞다고 생각하던 벨리사리우스는 이에 분노한다.

이후 둘은 사사건건 부딪히며 싸웠는데 이는 곧 군내의 분열로 이어진다. 기존에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싸우던 군인들은 대개 벨리사리우스를 지지했으나, 증원군과 그 외의 병력은 '결국 나르세스가 없었으면 이 승리고 뭐고 없는거였잖아?' 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나르세스가 군인들에게 봉급을 주는 역할을 맡았기에 군대는 사실상 반쪽으로 나뉘어져 버린다.

이 분열은 조금씩 조금씩 싸여오다가 메디올라눔 구원전에서 표출된다. 메디올라눔은 이탈리아 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중 하나로 로마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동고트군에의해 포위를 당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벨리사리우스는 즉각 군대를 북상해 메디올라눔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너무 위험하다며 우르비누스를 먼저 함락해 우르비누스 -> 아리미니움 -> 메디올라눔 이렇게 안전하게 진로를 뚫어놓고 가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리하지 않는다면 나르세스와 그의 부대는 따로 행동하겠다는 엄포를 내건다.

또다시 자신의 안이 나르세스에의해 반대 당하자, 분노한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그에게 내려준 명령장을 들먹이며 오직 자신만이 군대를 어디로 움직이고 어디서 싸울지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며 나르세스는 그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학에 능했던 나르세스는 명령장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로마에 이익이 될 때에 한해서' 라는 구절을 들먹이며 메디올라눔 구원전은 로마에 이득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고 당황한 벨리사리우스는 말로 해봐야 답이 안나온다는걸 알고 나르세스의 안대로 하기로 한다.

그렇게 군대는 우르비누스로 진군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우르비누스에 도착한 나르세스는 우르비누스의 방비가 너무 철저하니 차라리 적의 수도 라벤나를 공략함이 더 낫다 라고 말하며 요한을 설득해 나르세스 본인은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로 요한은 근처 지역의 정복을 맡기로 하였다. 문제는 이 행동을 벨리사리우스의 동의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이라 벨리사리우스는 무척이나 분노했고.

참을만큼 참았다고 판단한 벨리사리우스는 본국의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직통으로 '나르세스가 내 말 안들어요!'라고 항의하는 편지를 썻고, 이 편지를 받은 유스티니아누스는 즉각 나르세스를 소환해 해임하고 다시 한번 벨리사리우스만이 유일한 원정대의 총사령관이자 현장 지휘관임을 공포했다. 이후 드디어 군대를 원하는대로 주무를 수 있게된 벨리사리우스는 빠른 속도로 이탈리아를 정복해나가며 비티게스의 군대를 깨강정 내버리고 비티게스를 사로잡는데에 성공하고 전후 협상에 나서기 시작한다(이 때 즈음에는 로마군의 위엄이 워낙 높아 로마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줄줄이 도망치기에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의 확장에 겁을 먹은 사산조 페르시아가 로마와 맺은 화평 조약을 깨고(이 화평 조약을 맺기위해 유스티니아누스가 피똥 싸면서 노력했다) 동부 침공을 개시한다. 이런 급사태가 벌어지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일단 벨리사리우스를 불러와 급한 불 먼저 끄려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다 이긴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갈 맘 따위는 없었기에 명령장에 '원로원이 결정한 바...'(사실상 이 때 즈음엔 거수 기관 이외로는 기능치 않았다) 라는 부분을 문제삼아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의 직명이 아닌 이상 못 믿는다면서 일주일간 더 뻐팅기고 결국 동고트의 수도인 라벤나를 초토화시키는데에 성공한다.

기타 자잘한 재정복 사업[편집]

제위 말기[편집]

고딕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