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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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역대 차르
13대
알렉산드르 3세
14대
니콜라이 2세
제정 폐지
(러시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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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본명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нов
생년월일 1868년 5월 18일
출생지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918년 7월 17일(1918-07-17) (50세)
종교 정교회

개요[편집]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차르[1]이자 유명한 벌집피자이다. 물론 대국적이지 못해서 죽은 거지만 현재 러시아에선 좀 불쌍하게 여겨서 소련시절에 꿈도 못꿨던 장례식도 치뤄주고 일가족 전체를 러시아 정교의 성인으로 시성하고 그랬다. 재위기간은 1894년 ~ 1917년. 제정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순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편집]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5월 18일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엄마는 덴마크 공주였는데 이모가 영국의 에드워드 7세에게 시집가 조지 5세를 낳아서 니콜라이 2세와 조지 5세가 거의 쌍둥이마냥 닮았다고 한다. 참고로 원조 로마노프 왕가는 18세기 중반 엘리자베타를 마지막으로 단절되었으므로 니콜라이 2세 역시 진짜 로마노프와는 전혀 상관없는 독일계와 덴마크계와 스웨덴계로 구성된 방계 로마노프 왕조다.

어렸을 적 니콜라이 2세(애칭은 니키)는 남에게 봉사하는 따뜻한 성품은 지녔으나 너무 순진하고 우유부단해서 지도자 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 그것도 적장자[2]가 황제자리를 물려받는다는 현실속에서 이변이 없는 한 니콜라이가 제위를 계승한다는 건 당연지사였다.

황태자 시절[편집]

할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과격한 혁명가들의 폭탄에 끔살당하자 아버지가 차르(황제)가 되면서 자동적으로 황태자가 되었다.

황태자 시절에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또라이 극우 깡패한테 칼빵맞고 중상입은 적이 있었다.(오쓰 사건) 이 때 피묻은 셔츠가 남아있는데 훗날 황실 일가족의 유해를 발굴해서 신원확인할 때 유일한 증거물이 되었다. 남아있는 혈흔에서 DNA 추출해서 대조할 수 있었으니까.

그 후 회복되어서 어느 파티에서 독일출신이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인 알렉산드라[3](애칭은 알릭스)와 그 당시 왕족에선 드문 자유연애로 결혼에 골인하였다. 그런데 하필 알렉산드르 3세가 갑작스레 죽고 난 뒤 1주일 후에 결혼해서 말이 존나게 나왔다. 부부 사이는 금슬 한번 기가 막히게 좋았다지만 알렉산드라는 시어머니와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애시당초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관계가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다가 시어머니의 고향인 덴마크가 독일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기에. 니콜라이 입장에서는 자기의 출신지역들이 서로서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즉위[편집]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4]가 신장병으로 반백도 못채우고 승하함에 따라 제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원래 아버지는 아직도 뭐가 뭔지도 모른 아들이 나이 서른이 될 때 후계자 교육 시키려고 했는데[5] 갑작스레 죽어서 니콜라이는 존나 어쩔 줄 몰라했다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는 표트르 1세 이후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차지하고 그 이전의 수도였던 모스크바는 황제 대관식 용도로 쓰는 곳이었기에 니콜라이는 모스크바에 가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뤄 황제가 되었다. 이 때 민영환도 참관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관식의 도중 목걸이가 그의 목에서 떨어지자 모두들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목격자들에게 함구할 것을 명령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비극은 또다시 터졌는데 대관식 끝나면 야외에 일반 백성들 모아놓고 먹을 거 나눠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이 때 무려 10만~수 십만명의 군중이 몰려 1,389명이 압사하고 1,300 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터졌으니 가히 북대륙의 기상을 만천하에 드러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황제는 JOY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자료에선 쌩까고 만찬에 참석하여 부부끼리 춤추고 자빠졌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이걸 두고 불길한 징조로 여겼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무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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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민비. 을 등용했고, 결국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점. 이 전에도 나라가 거의 막장의 가까웠다는 점에서 고종과 똑같다. 사실 얼굴도 고종과 약간 비슷해 보이는 인상이다.

아내에겐 헌신적인 남편이자, 자녀들에겐 참으로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아버지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여항의 일반 백성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군주였고, 그것도 영국처럼 입헌군주제 하의 군주가 아닌 모든 권력을 틀어쥔 전제군주였기에 이 점이 그에게나 그의 가족에게나 그의 신민과 국가에게나 문제거리였다.

일단은 자기 자신도 인정할 만큼 착하지만 우유부단하고 아무것도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그러는 주제에 지 똥고집은 존나게 쎄서 설령 충직한 신하가 충고하더라도 씹었다고 하니 나라가 개판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보수적인 정책을 더더욱 강화하여 자기가 두려워하는 변화를 최대한 피해보려고 노오오오력 한 결과가

언론 통제
민초들의 의견 좀 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맨든 지방의회를 축소
유대인 탄압,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이전의 최대의 유대인 탄압을 벌였다. 결국 자기 목숨 날려버린 게 유대인이라는 건 안비밀
제국 내의 폴란드, 핀란드 독립운동 탄압

뭐 그러하다. 덕분에 자기 대신에 고기방패가 된 관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한편 러시아도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들어 나름 경제발전을 했다지만 후세의 스탈린에 비할 바는 못되었고 빈부격차가 존나게 커서 문제가 되었다.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결국 러일전쟁에서 쳐발리고 그래놓고도 정신을 못차려 1차세계대전에서는 거하게 털린다.

러일전쟁[편집]

개인적으로 아시아에 꽤 관심을 가졌는데 정확히는 조선과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동양을 연구하는 대학을 세우고 그 땅으로 넘어온 조선인들더러 개척하라고 하고 만주땅에 철도 놓고 하여튼 당대 열강의 제국주의 광풍에 뛰어들어 극동지역에 공들였다. 고종이 도와달라고 하니까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게 해주고(아관파천) 대한제국땅에서 이런저런 이권도 챙겨먹고 그랬다. 그래서 19세기 말에는 헬조선의 주인니뮤로 지냈다.

당시 러시아는 대영제국과 일명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는 대치 상황에 놓여 있었다.[6] 러시아가 부동항 찾아 남하하려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영국은 마침 조선반도 쳐먹으려는 일본과 손잡고(영일동맹) 영국과 미국의 지원과 부추김으로 인해 일본은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을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뤼순 일대에서 오랜 기간 버티다가 결국 크림 전쟁 때 세바스토폴처럼 GG치고 철수하고 이어 만주 땅에서도 밀리고 있었다.[7] 발틱함대가 북해 대서양 인도양을 거쳐서 왔지만 대마도 앞바다에서 좆망.

결국 일본의 승리엿다. 하지만 일본도 일본 나름대로 굉장히 크게 피를 봐서(사실 이 전쟁 때문에 이가 갈릴대로 갈린 일본은 훗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서 러시아 내전이 발생하자 이것을 부축여서 러일전쟁 이상의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한다.) 조선 반도 북쪽까지만 진격해야만 했고 러시아는 결국 판정패를 선언하고 조선과 남만주에서 손떼야 했다. 그저 노란 원숭이에 불과했던 일본에게 당한 건 존나게 뼈아팠지만 국내 상황은 그보다 더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었으니...

피의 일요일[편집]

경고! 이 새끼는 인간을 밥 먹듯이 죽여댄 인간도살자입니다!!
이 문서에서는 인간을 대량으로 도살해버린 쓰레기 새끼들에 관해 설명하고 있으니 정상적인 인간은 자리를 피하십시오.
Ah! Fresh Meat!!!!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도 않았는데 일을 거하게 터뜨렸다.

그간 제정 러시아 내에서 좌익 지식인들이 세를 불리고 노사 갈등이 존나게 터져도 그래도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차르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차르야말로 찬란한 태양빛이나 다름없고 지금 백성들 처지가 힘들어진건 단지 간신배같은 구름이 황제 폐하의 은혜를 가린 것일 뿐이라는, 참으로 순진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 때 처신을 잘 했으면 러시아 혁명때의 비참한 최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날려버린 좆병신이 니콜라이 2세였다.

사건의 발단[편집]

1905년 1월 22일[8] 게오르기 가폰이라는 신부가 노동자를 불러다 놓고 황궁으로 향했다. 브치로프의 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부당하게 해고되어서 노동자들이 들끓고 있을 때 황제에게 바칠 탄원서를 내려고 간 것이다.

이 가폰이라는 신부는 사실 정부의 스파이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노동자들이 과격한 노조에 가입하는 걸 존나게 막으려고 별의별 수를 썼는데 그 중 하나가 어용노조였다. 분노한 민심을 조금이라도 덜 위협적인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이유였고 가폰 신부의 임무였다. 가폰 스스로도 과격한 혁명보다는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노동자의 진정한 이익과 당국의 선한 의지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비밀경찰의 첩자를 자청한 것이다. 결국 신부라는 직위와 고결한 이상을 내세워서 노동세력의 민심을 수습하고 우두머리 격인 존재로 올라설 수 있었다.

시위대의 수는 존나게 불어서 무려 5,6만명 가량 되었다.(그 신부는 30만 드립쳤다고)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구는 200만 가량의 대도시인걸 감안하면 엄청 많은 거다. 탄원서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폐하! 저희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정의와 보호를 구하기 위해 당신께 갑니다. 저희는 가난 속에 억눌리고 힘든 노동 속에 모욕 당하면서도 비참한 운명을 묵묵히 참아내며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저희의 인내는 고갈됐습니다. 고통을 견뎌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저희는 일을 멈추고 고용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구는 거절됐습니다.

게다가 이때 정부당국은 공업화의 자본을 얻기 위해 과격한 수출장려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국내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물가가 폭등하였다.(인플레이션)

이런 어처구니 없는 수출 정책은 기근 중에도 계속되어서 민중의 고통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농민은 인플레와 기근에 시달리고 노동자도 인플레와 저임금에 시달리는 아주 엿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발포[편집]

그러나 그 시각 황제는 황궁이 아닌 인근 별궁에 머물고 있었고 돌아온 것은...

황궁 앞에서 군인들이 시위대에 발포하고 시위대 뒤편에선 대포(!)도 발사되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코사크 기병대가 우왕좌왕한 시위대에게 칼부림하고 그랬다. 그날은 일요일, 성당에 예배하러 갈 거룩한 일요일이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황제는 뭘 했냐고? 탄원서는 씹었고 시위대 온다 어떡하지 하고 묻자 걍 쏴버리죠 하는 신하의 대답에 그러라고 별 생각없이 말한 거다. 심지어 일기에 이렇게 썼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다행히 충직스러운 군인들이 이들을 물리쳤다. 하느님이시여, 이들을 보우하소서.

지금까지 황제에 대한 믿음은 산산조각나고 모스크바, 바르샤바(당시 러시아 제국령) 등 주요 도시에서 노동자들이 총들고 군인과 대치하고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구에 정박한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거대한 나라가 한순간에 개판되었다. 그 희대의 뻘짓이 결국 자신과 가족과 황실과 제국의 목을 죄게 될 것임을 멍청한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알지 못했다.

혁명 수습 이후[편집]

피의 일요일로 인한 소요사태는 1907년에 가서야 겨우 진정 되었다. 그 와중에 정치를 개혁하자는 자유주의자들의 항의도 이어져서 결국 입헌군주제를 약속하고 의회를 열었다. 두마(현 러시아의 하원인 국가두마의 그 두마 맞다)라는 이름의 의회가 탄생했지만 25세 이상의 군인이나 노동자가 아닌 남성으로 선거권을 제한하였고 황제에겐 비상시 입헌권이나 해산권을 부여한 무늬만 입헌군주제였다. 한마디로 꼼수

황제는 어찌어찌 수습했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했지만 천만의 말씀. 이미 돌아선 민심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잘 해볼 노오오오력도 한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더한 병신짓이나 해댔으니.

참고로 이 당시를 찍은 사진은 단 한장도 없다. 굉장히 빠른 시간동안 벌어진 일이어서 사진을 찍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를 목격하고 그린 그림들도 없으며, 이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모두 상상화다. 사실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가 불명이기 때무인데 비록 정확하게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알려졌기에 사망자 수/부상자 수를 표현하는 것은 그저 숫자놀이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가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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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황가

여기서 잠깐만 가족들을 살펴보자면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1872년 6월 6일 ~ 1918년 7월 17일)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애미애비가 처뒤졌습니다.
이게 아부지도 없는 게 까불어!!! 너희 아부진 돌아가셨어, 그것도 모르냐?
애미 애비 뒤진년아!
그지? 그녀석 양친이 없잖아?
앞서 설명했듯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다. 또한 당시에 드물었던 왕족간의 자유연애로 결혼에 골인하였고 당시 귀천상혼이 존나게 흔했던 러시아 황실에서 서로 내연관계의 애인 그런 거 없고 배우자에 충실했다고 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분이랑 니콜라이 2세와는 7촌 사이이다. 자녀들을 키울 때 유모 안쓰고 직접 모유 수유했다고 할 정도로 존나 가정적이었다. 원래 기품있고 아름다운 외모에 자상한 인품을 지녔으나, 대중에 노출되기를 꺼려하고 늘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았다. 거기다 하나뿐인 아들의 건강땜에 결국...
양쪽 집안의 가계도를 열라게 추적해본 결과 알렉산드라의 언니 엘리자베트가 니콜라이의 작은아버지인 세르게이 대공의 아내이다. 즉, 위에서 말한 7촌이라는 것은 촌수 상 알렉산드라가 니콜라이 2세의 숙모님이 된다.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1895년 11월 15일 ~ 1918년 7월 17일)
자녀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17세에 기마대장도 하고 그랬다. 꽤나 영리해서 주변에서 여자라서 안타깝다. 남자라면 당연히 제위계승자인데 하는 탄식을 했다. 러시아 황실은 18세기 말 파벨 1세가 꼬장부린, 아니 제정한 황위계승 원칙에 따라서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녀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1897년 6월 10일 ~ 1918년 7월 17일)
자매들 중 존나 미인이고 당시 서양여자 치곤 키가 큰 편이었다. 조용한 편이고 아버지의 일도 도왔다고 한다.
3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1899년 6월 26일 ~ 1918년 7월 17일)
조용한 성격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바로 아래의 동생인 아나스타샤의 장난을 받아주고 하는 사이. 명탐정 코난의 세번째 극장판 세기말의 마술사에선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는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무사히 살아남아 일본으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딸도 낳고 잘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 시댁이 지어준 성의 지하실에 묻혔다고 함. 그녀의 시신이 2007년 10월에 발견되는 바람에 이 설정은 졸지에 역사왜곡을 시킨 최악의 고인드립이 된 셈이다. 그래서 띵작에서 졸작이 되어버렸는데 이런 경우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정말 희귀한 사례다.
4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여대공(1901년 6월 18일 ~ 1918년 7월 17일)
디즈니 만화들 중 하나인 <<아나스타샤>>의 배경이 되는 인물. 활발하고 짖궂은 장난을 치고 그랬다. 사진에도 관심이 많아서 사진 많이 남겼다. 아픈 남동생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착한 심성을 지녔다.
외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1904년 8월 12일 ~ 1918년 7월 17일)
왜 문제가 되었는지는 후술

좀 깨는 얘기지만 황제 일가는 모두 흡연충이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몰라도 알렉세이는 그 병약한 몸으로 담배를 뻑뻑 피워댔으니 병으로 안죽은게 기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담배의 해악은 2차대전 이후에나 대중에게 알려졌다. 담배 극혐해하는 히틀러가 저 당시에는 되려 이상한 놈 취급받았음.

당시의 담배는 지금의 초코과자 정도로밖에 생각을 안 했다. 지금처럼 온갖 화공약품이 들어간 게 아니라 진짜로 담배잎을 말려서 잘게 썰은 조각만 넣었다.

솔직히 올가, 마리아, 타티아나, 아나스타샤, 알렉세이 이 5남매랑 이 새끼를 바꿔치기해서 이 5남매를 모두 살리고 그 새끼를 니콜라이 2세의 외아들이라고 하고 빨갱이들 손에 넘겨줘서 죽게 만들었어야 했다.

친척[편집]

이 문서에서 서술되는 대상은 조지 5세와(과) 닮았습니다.
이 문서는 관계는 없지만 공통점이 많거나, 매우 닮은꼴인 인물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도플갱어일까요? 동일인물일까요? 아니면 투잡일까요?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영국의 국왕 조지 5세와는 외가쪽 사촌형제인데 놀랍게도 둘이 같이 있으면 누가 조지 5세고 누가 니콜라이 2세인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너무 심하게 똑같이 생겼다.

누가 조지 5세이고 누가 니콜라이 2세인지 알아맞춰 보시라.

오른쪽은 잘 모르겠고 왼쪽은 흰 예복을 입은 쪽이 조지 5세다.

둘 다 오른쪽이 조지 5세 맞다. 눈매 날카로운 쪽이 조지 5세고 그 반대로 흐리멍텅하게 생긴게 니콜라이 2세다.

각자의 어머니가 친자매지간인데 일란성 쌍둥이급으로 닮았다.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조지 5세의 어머니이고 다그마르는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데 이 역시 누가 다그마르이고 누가 알렉산드라인지 알아맞춰 보시라.


이렇다 보니 니콜라이 2세는 엘리자베스 2세의 친인척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조지 5세의 손녀이다.

라스푸틴의 전횡[편집]

황후인 알렉산드라는 혈우병 보인자였다. 외할머니 빅토리아여왕에게서 시작되었던 혈우병 발병 인자가 외손녀대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쉽게 말해 정상인 X염색체와 혈우병 발병 인자가 포함된 X'염색체가 있다고 치자. 혈우병 보인자인 여성은 XX'이다.[9] 그 여자가 XY염색체를 가진 정상 남자와 포풍섹스하면 XX와 XX'을 가진 딸, XY와 X'Y를 가진 아들을 싸지를 수 있는데 이 X'Y를 가진 아들은 평생 혈우병 환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황태자 알렉세이가 이렇게 혈우병을 가진 채로 태어난 것이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처음엔 러시아 황실의 예법도 모르고 딸 올가를 낳았다고 좋아했는데 황위는 아들만 이어받을 수 있다는 걸 좀 늦게 알고는 아들 낳으려고 존나게 빌었는데 그 뒤로 딸을 내리 셋 더 낳고나서야 1904년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알렉세이를 출산하여 무척이나 기뻤는데...씨발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가 응고되지 않는다 뭔 시퍼런 멍이 큼지막하게 생겼다는 호들갑을 황제가 일기에다가 쓸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고 궁중 어의가 조심스럽게 혈우병 판정을 내리고 나선 황제 부부는 존나게 절망했다고 한다.

운명에 순종하며 사는 멍청한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체념했고 특히 황후는 안그래도 워낙 내성적인 성품인데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 평생 병신으로 살아가야 하다니 존나게 절망에 빠져 뒈짖할 때까지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다.

그 무렵에 친하게 지내는 시녀 겸 말동무인 안나 비루보바의 소개로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만나게 되었다.

라스푸틴 항목이 부실해서 여기서 보태자면 그는 시베리아출신으로 문맹이었다.[10] 어려서 여자 따먹고 하여튼 방탕한 생활을 보내다가 돌연 수도승을 자처하며 가출해 동방 정교회에서 성지라 일컫는 그리스 아토스 산, 터키 카파도키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을 떠돌다가 지 딴에 뭔 영적인 힘 어쩌구저쩌구한거를 터득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고 당시 심령술 따위에 심취한 러시아 귀족들에게 환심을 사서 명성을 얻고 마침내 황실에 진출한 것이었다.

마침 알렉세이 황태자가 혈우병이 도져서 병상에 누운 상태였다. 의사들도 어쩔 줄 몰라서 쩔쩔매고[11]있는 상태였는데 라스푸틴은 아픈 아이를 달래고 기도하고 했는데 정말로 지성이면 감천이었던 건지 아님 운빨 기가막히게 좋은 건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증상이 가라앉았다. 황제와 황후가 이 라스푸틴을 총애하는 건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황제는 황후를 존중하는 것을 넘어서 의지할 정도였고 그런 황후는 라스푸틴의 추종자였다. 라스푸틴은 황제부부를 등에 업고 서서히 러시아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종교[12], 외교, 내정 가릴 것 없이.

세르게이 비테[13] 이후 총리 자리에 오른 표트르 스톨리핀[14]은 라스푸틴을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고 비밀경찰에게 명해 뒷조사를 해 라스푸틴이 귀족여성들을 꾀어 방탕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황제에게 직언했다. 하지만 황제는 쌩깠다.

장녀 올가 공주도 엄마한테 제발 라스푸틴을 신뢰하지 마라 죽어 마땅한 자다 라고 충고했는데 애미라는 씨발년은 존나 역정을 냈다고 한다. 모녀 사이가 존나게 나빠진 건 덤이다.[15]

제1차 세계대전[편집]

가면 갈수록 팀킬이나 해대는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때마침 기회가 온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안그래도 반란이니 어쩌니 하고 제국 내부가 불만으로 가득한데 그걸 해소할 수 있는 게 바깥에서의 전쟁이었다. 아, 잘 싸워서 승리를 거뒀다면 말이다.

더군다나 당시 독일과의 사이도 존나게 안좋아서 수도 이름을 페트로그라드라고 바꿀 정도였다. 독궈놈들 몰아내자는 목소리에 제국 내에서 무려 1700만명(당시 러시아의 인구가 1억은 넘었으니까)의 백성들이 참전했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가볍게 관광태울 정도로 수월하게 치뤘지만 독일과 치른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개쳐발리는 굴욕을 당했을 정도로 갑자기 안좋아졌다. 그러자 군사적인 능력은 쥐좆만큼 없었던 니콜라이 2세는 아예 지가 전쟁터로 나가 최고지휘자가 되었다! 제정 러시아의 장군들 대다수가 무능한 똥별들로 가득한데 고문관만도 못한 황제새끼가 전선에 나서서 잘도 군사들 독려하고 작전을 지시한댄닼ㅋㅋㅋㅋ

황제가 수도를 비우니 황후가 대신 정치를 나서게 되었는데 이 황후란 년 앞서 말했지만 라스푸틴을 마르고 닳도록 구세주로 믿는 씨발년이었고 라스푸틴은 라스푸틴대로 황후를 등에 업고 이전부터 행한 병신짓을 더더욱 강화하여 안그래도 내려갈 국력이 더 내려가게 되었다.

황후는 라스푸틴이 이런저런 계시를 했다며 계시대로 공세를 펼치면 승리할 거라고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고 황제는 정말 그대로 따랐다. 참모들이 반대해도 그대로 밀어붙였지만 결과는 좆망ㅋㅋㅋㅋㅋ 그 결과 러시아군의 전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고 억울하게 증발된 군바리만 백만 단위를 넘었고, 러시아는 서부 공업지대와 곡창인 우크라이나까지 독일군에게 빼았겨 국가존립이 위태롭게 되었다.

국내 상황은 더할 나위없이 개판이 되었다. 라스푸틴이 인사에 관여하는 바람에 충직한 신하들이 파면되고 그 자리를 메꾼 건 라스푸틴에게 아첨한 무리들이었고 하나같이 무능하고 사리사욕에 급급한 개새끼들이었다. 세율 90%. 씨발 이게 나라냨ㅋㅋㅋㅋ 솔까 최순실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나라 말아처먹은 거 아니냐. 박근혜 때 국가 행정은 적어도 경험 많은 새누리당 수뇌부+관료들이 알아서 잘 돌리기라도 했지ㅋㅋㅋ

보다못해 태후(그러니까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가 직접 전선에 와서 황제에게 제발 수도로 돌아오라고 청했는데 아들놈이라는 새끼가 말을 또 안들어요 씨발.

ㄴ이런 대자보가 나돌았을 정도로 나라가 개병신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황후가 독일년인데 이 나라가 독일한테 쳐먹히는거 아니냐는 유언비어[16]가 나돌 정도로 나라가 좆병신이 되었다.

몇몇 귀족들은 이 상황을 더는 보다못해 라스푸틴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황실을 살리고 자신들도 살기 위해선 황제와 황후를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라스푸틴을 제거해야 제국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믿음 하에 뭉쳤고 그 중심에는 뼈대있는 귀족집안에 황제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펠릭스 유스포프 공작이 있었다. 라스푸틴이 자신에게 게이라고 모욕을 줘서 혹은 라스푸틴이 아내에게 흑심을 품어서 등의 개인적인 원한도 있고 해서 암살에 가담했다.

한동안 라스푸틴의 죽음에 관해서 무슨 전설적인 이야기가 나돌았는데 대략 이렇다.

암살 주모자는 황제의 조카인 이리나 공주의 남편으로 당시 러시아 최대의 유산 상속자였던 유스포프 공과, '검은 100인조'의 창설자 푸리슈케비치였다. 그들은 평소 라스푸틴이 아리따운 이리나 공주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것을 이용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12월 말, 그들은 공주를 딴 곳으로 빼돌리고 공주의 초대장으로 라스푸틴을 유스포프의 저택으로 불러냈다. 1층의 '암살실'은 호화롭게 꾸몄고 식탁 위에는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와 독이 든 포도주를 올려놓았다.
라스푸틴은 유스포프가 친히 모셔왔다. 유스포프는 공주가 2층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는데 곧 내려올 거라면서 그에게 계속 술과 과자를 권했다. 독이 퍼진 라스푸틴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타를 잘 치는 유스포프에게 집시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겁에 질린 암살자'는 기타를 치고 '시체'는 술 마시며 노래 부르는 기이한 광경이 몇 시간이나 계속됐다.
견디다 못한 유스포프가 마침내 권총을 꺼내 라스푸틴을 쏘았다. 라스푸틴이 고꾸라지고 2층에 있던 공모자들이 뛰어내려 왔다. 그때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서서 유스포프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견장을 북 뜯어내고는 비틀비틀 옆문 쪽으로 걸어갔다.
푸리슈케비치가 연신 몇 발을 쏘아 라스푸틴을 쓰러뜨렸다. 공모자들은 밧줄로 시체의 양손을 묶어, 얼음을 깨고 강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사흘 뒤 라스푸틴의 시체가 발견됐다. 손을 묶은 밧줄은 풀려 있었고, 폐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사인은 독에 중독돼 죽은 것도 아니고 총 맞아 죽은 것도 아닌, 익사였다. 어쨌든 라스푸틴은 죽었고, 살인자들은 동정적인 여론에 힘입어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출처 : [1]

그런데 최근에 라스푸틴의 사인이 총살이고 익사나 독살의 흔적은 없으며 MI6의 개입이 일정 부분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좀 거리가 있었다는 말이다. 예언이라고 남긴 편지도 주작이라고 한다.

출처 : [2]

암튼 라스푸틴은 그렇게 뒈졌다. 하지만 제국은 암살범들의 바람과 달리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17]

혁명과 퇴위, 제국의 좆망[편집]

1917년 3월 8일[18]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선 식량 배급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온건하게 진행되었지만 시위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도시 노동자 대부분이 참여하게 되었다.

12년 전처럼 경찰과 군대로 찍어누르면 그만이겠지 하고 군대를 투입해 시위대를 해산하라고 지시를 내려 처음에 시민에게 발포도 하고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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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시위대 편에 서는 사태가 벌어졌다. 심지어 악명높은 카자크 기병대도 합류했다! 물론 비밀경찰의 지부는 성난 시위대에게 털리고 요원들은 쳐맞고 다녔다고 한다. 다른 부대에서도 항명, 프래깅이 터져나왔고 무기고가 시위대에 의해 점거되고 이런 움직임은 수도를 넘어 모스크바 등 다른 도시로까지 확산되고 의회(두마)가 비상소집해 차르 퇴위를 결의하니 좆병신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더는 못 버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황태자 알렉세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다가 병약한 아들로는 안심이 되질 않아 동생 미하일 대공[19]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의회는 미하일도 니콜라이와 다를 바가 없었기게 미하일에게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결국 미하일은 형에게

"형님, 저 또한 형님 폐하처럼 백성들로부터 욕들을 짓을 할 수 없습니다"

라는 말로 거절했고 결국 니콜라이가 그냥 퇴위함으로써 304년에 걸친 왕조, 천년 가까이 이어온 전제군주제는 이렇게 쫑나고 말았다.

퇴위 이후[편집]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가족들이 함께 살게 되었지만 이제 따뜻한 황궁이 아닌 평범한 민가에 머물게 되었고 이제 차르가 아닌 임시정부의 머튽[20]직에 오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지휘를 받는 군사들의 감시 하에 놓여졌다. 케렌스키가 영국으로 몰래 보내려하다가 존나게 욕처먹고[21] 시베리아의 소도시 토볼스크에 황실 가족들을 유폐시킬 수 밖에 없었다.

유폐되고 나서도 생활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케렌스키의 군인들은 황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심지어 황실의 여성들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일일이 감시하는 등으로 인하여 황후는 안그래도 고질병으로 남은 신경쇠약이 또다시 도졌다. 외출도 제한되었고[22] 폐하 같은 칭호도 마음껏 부를 수 없었다.

케렌스키가 빨갱이들의 쿠데타(10월 혁명)으로 나가리되어 해외로 망명하고 황실 일가족들 관리는 공산당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그래도 몇개월 동안 크게 달라진 건 없었는데...

처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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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산정권에서도 이 황제가족을 어찌 처리할까 하고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적백내전이 터지고 백군이 황제일가가 있는 곳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에 화급히 처형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진바가 없다. 트로츠키레닌이 명령을 내렸다고 암시하는 글을 남겼는데 자세한건 몰라.

암튼 모스크바에서 황제가 머무른 예카테린부르크의 공산당 지부에 처형 명령을 하달했고 이를 집행할 이들 중 우두머리가 유대인인 야코프 유로프스키였다.

황제 가족은 우랄 산맥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예카테린부르크라는 도시에 있는 이파티예프 하우스에 머물렀는데 이 집은 로마노프 왕조 개창자가 황제되기 전에 살았던 집이다. 평소와 다를바 없이 생활하다가 7월 17일 새벽 처형 명령을 받은 유로프스키 일당이 황제 가족을 깨운다. 백군이 쳐들어오니 몸을 피해야 한다며 당황한 황제 가족을 안심시키고 그 전에 사진은 찍고 가자며 반지하 방으로 이동시켰다. 잠에서 깬 황제 가족들은 별 의심 없이 따랐다.

유로프스키는 잘 쏠 수 있게 황제와 황후, 황태자, 공주들, 시종들을 배치시키고나서 모스크바에서 내려온 처형 명령서를 읽는다.

유로프스키 :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당신네들을 우랄 소비에트의 명령에 따라 총살시키기로 하였소!
니콜라이 2세 : 뭐라고 했나? 잘 들리지 않는데...[23]


끝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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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순간

2000년에 나온 러시아 영화인데 처형장면 빨리 보고 싶으면 2분 20초 쯤부터 봐라

니콜라이 2세가 물어보는 거에 대답하나 안하고 유로프스키 일당들의 권총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쓸데없이 피 많이 튀기는 일 없도록 급소를 정조준하는 바람에 니콜라이 2세는 즉사하고 황후와 공주들, 황태자 알렉세이, 시종들, 심지어 아나스타샤가 키우던 애완견 모두 목숨을 잃었다. 황제를 즉사시킨 건 성공했는데 다른 사람들 쏴죽일때는 걍 존나 난사하는 바람에 피튀기고 방 안에 연기가 자욱했다고 한다. 어느정도 연기가 걷히고 난 후에 확인해보니 황녀 하나가 신음소리 내니까 확인사살(혹은 개머리판으로 후려쳐서)로 끝장냈다.

그렇게 피를 본 다음 유로프스키 일당은 보석[24]들을 압류하고 시체들을 대기시켜뒀던 트럭에 쌓은 다음 미리 정해둔 암매장 장소로 이동했다. 옷들을 다 벗기고 알몸에 황산을 존나게 뿌려댄 다음 땅에다 묻어버렸고 그렇게 70여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여담으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인성들은 좋았던지, 유로프스키는 그 일가를 꽤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고,[25] 니콜라이 2세를 죽인 것을 평생 후회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다 60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황후는 예외였다. 얼마나 씨발년이길래 동정도 못받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ㄴ 황후년은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나라를 수프에 말아쳐먹는 와중에도 "오오 라스푸틴~ 라스푸틴~" 이지랄 떨어가며 라스푸틴의 후견인 역할을 자청했으며 그것 때문에 큰딸인 올가와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참고로 라스푸틴이 얼마나 씨발놈이냐 하면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라스푸틴의 이름을 욕으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유해 발굴 및 재평가[편집]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이 그렇게 참혹하게 죽고 나서 인근 지역에선 다른 황실 가족 몇몇이 수류탄으로 폭사당했다.

1918년 처형당한 이후 소련이 무너지는 날까지 장례조차 못치르고 암매장된 상태로 그렇게 시간만 흘렀다.

소련 붕괴 이후 유해발굴 작업이 실시되어 결국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뼈가 뒤섞이는 바람에 신원파악 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과연 니콜라이 2세가 맞는지 오쓰 사건때 피묻은 셔츠와 영국 왕실의 유전자와 대조하는 등의 과정 끝에 신원 파악에 성공했다. 그렇게 황실 가족들 중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한 마리아 공주와 알렉세이 황태자를 제외한 일가족 전원의 장례식이 1997년에 거행되었다.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추도사를 발표했다.(물론 취한 상태로) 하필 자기 고향인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목숨을 잃은 황실 가족에 대해 동정심도 들었던 한편 소련 붕괴 이후 남은 러시아 연방마저 체첸 사태 등으로 분열하려는 걸 막아보려는 차원에서 니콜라이 2세를 재평가하기에 이르렀다. 우린 공산당 이전에도 차르를 구심으로 여러 민족이 뭉친 바가 있다는 걸 눈물겹게 외치려는 속셈이 있던 것이다.

그 때 못찾은 마리아, 알렉세이의 유해도 2007년에 발견되었다.

황제 일가족의 처형 이후 한때나마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를 사칭하는 사기꾼이 여러 등장하긴 했었다. 그래봐야 가짜지만,[26][27]

현재 러시아인들이 니콜라이 2세에 대해 대체로 동정적이다. 물론 병신이라는 점은 전제로 깔고 가지만.

2001년 황제 일가족이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2008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정치적 탄압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판결을 내려, 그의 정치적 복권이 이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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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1939년: 폴란드 침공 · 영국 프랑스의 선전포고)
1940년: 노르웨이 침공 · 프랑스 침공(샤를 드 골 · 자유 프랑스 · 비시 프랑스 · 프랑스 군정청 · 레지스탕스) · 그리스 침공
1941년: 소련 침공->독소전쟁 ·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1942년: 미드웨이 해전 ·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카이로 회담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1945년: 얄타 회담 · 독일 항복 · 포츠담 회담 · 일본의 무조건 항복
전후 처리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 극동국제군사재판 · 독일 분할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유엔(대서양 헌장 · 샌프란시스코 회의 · 안전 보장 이사회 · 상임이사국 · 유엔군)

각주

  1. 현 시대에 차르라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말고 진짜 전제군주 차르
  2. 유럽 왕실에서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서자는 아예 왕위 계승을 못했다.
  3. 마침 알렉산드라의 언니 엘리스(애칭은 엘라)도 니콜라이의 삼촌인 세르게이 대공과 결혼했던 상황.
  4. 부친인 알렉산드르2세는 그래도 진보적이라도 했는데 정반대로 천성이 보수적인데다가 하필 아버지가 과격 좌파세력한테 끔살당한게 분해서 반동적인 정치를 폈다.
  5. 그렇게 생각할만도 한게 알렉산드르 3세는 원체 힘이 장사였고 건강한 편인지라 오래 장수할 거라고 자신했고 주변 사람들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근데 갑자기 급사할 줄 몰랐던 거지.
  6. 20세기의 냉전도, 현재 21세기도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된다. 영국의 포지션을 미국으로 대체되고 러시아 포지션에서 중국으로 대체된게 차이점이다.
  7. 대신 일본도 존나게 인명손실을 맞봐야 했다.
  8. 제정 시절 러시아는 지금 쓰는 그레고리우스 달력이 아닌 율리우스 달력을 써서 그 당시로 치면 1월 9일이다.
  9. X'X'인 여자는 살아서 태어나지 않는다. 터너증후군으로 X'만 있는 여자면 몰라도
  10. 당시 제정 러시아는 문맹률이 80%였음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11. 지금도 혈우병은 인공 혈액응고 인자 투입 말고는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하물며 그 당시에는...
  12. 당시 러시아의 국교인 동방 정교회는 표트르 1세 이후 차르가 종교의 머튽이 되었다.
  13. 이 양반은 대단한 강직한 충신이자 그나마 능력있는 축에 속한 관료로 뒤늦은 산업화를 일으킨 주역이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과의 회담 자리에서 배상금 내줄 수 없다고 당당히 버텨 결국 관철해낸 사람이다. 심지어 블라디미르 레닌도 호의적으로 평했다. 하지만 차르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쓸쓸히 지내다 러시아 혁명직전인 1916년 사망ㅠㅠ
  14. 이 양반도 유능하고 개혁적인 인물이긴 했는데 반정부세력을 혹독하게 찍어누르는(내무장관도 겸직해서 경찰을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으니까) 정책을 이어가다가 1911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황제와 함께 오페라 보러가다가 암살당했다.
  15. 그런데 라스푸틴이 황녀들도 따먹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나돌았다고 한다. 응?
  16. 그런데 실제로 라스푸틴은 독일과의 강화를 추진할 것을 넌지시 제안하기도 했다. 영국의 MI6가 암살 작전에 개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았던 모양
  17. 유스포프 공을 포함한 암살범들은 혁명 직전에 추방되었다.
  18. 그레고리우스 력 기준. 당시의 율리우스 력으로는 1917년 2월 23일
  19. 귀천상혼으로 자식을 봐서 그의 아들은 제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다.
  20. 정확히는 총리
  21. 영국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병신같은 차르의 망명을 받아줘야하냐며
  22. 왜 산책같은것도 마음껏 못하냐고 황제가 항의하자 대답으로 돌아온게 "인민들이 당신 모가지 노리고 있는데 별 수 없지 않느냐."였다.
  23. 왜 이랬냐면 밖에서 트럭 엔진소리가 존나게 시끄럽게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24. 황후와 황녀들 모두 보석을 코르셋 안에 숨겨뒀던 탓에 이게 잠시동안 방탄 역할을 했다.
  25. 유로프스키는 황제 일가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의 책임자로써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처형할때까지 최후의 2주 정도를 같이 보냈는데 니콜라이 2세를 전형적인 신사같았다고 회고했다.
  26. 다만 자신이 알렉세이임을 주장했던 자들 중 "바실리 필라토프(1907~1988)"가 있는데, 이 사람은 DNA감사결과가 로마노프 일가와 제법 일치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실제 알렉세이 시신이 확인되기 전까진 그가 정말 알렉세이라 믿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DNZ검사결과 때문에 그의 정체가 뭐였는지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27. 하지만 그렇다고 바실리 필라토프가 진짜 알렉세이라고 하긴 힘든게 로마노프 황실의 남자들이 성적으로 문란한 경우가 많아서 그 사생아의 후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알렉세이가 피부에 상처 하나 생겨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중증 혈우병 환자인데 벌집핏자가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지는...